서양음악사

무조성과 음렬기법 2/7(2023.02.13)

작은대학교 2023. 2. 13. 18:00
반응형

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알아본 비엔나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태동한 표현주의라는 것과 표현주의 음악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 표현주의

 

이번에 다루는 무조성과 음렬기법에서는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세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년 ~ 1935년)의 음악을 주로 다룰 예정인데, 아놀드 쇤베르크나 알반 베르크의 초기 무조성 음악을 대개 '표현주의 음악'이라고 부릅니다. 표현주의라는 용어는 인상주의와 마찬가지로 미술사조로 부터 나타난 말입니다. 우리말로 보면,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인상주의'와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전개된 '표현주의'는 서로 대비되는 용어로 해석하기에 조금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 이 용어들이 유래된 독일어를 보면, 인상주의(Impressionismus)와 표현주의(Expressionismus)는 알파벳 첫 두 글자만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대칭적이라는 점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즉 인상주의가 안으로(Im)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면, 표현주의는 밖으로(Ex) 표출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용어부터 서로 대조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활동한 유명한 표현주의 화가로는 파울 클레(Paul Klee, 1879년 ~ 1940년)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년 ~ 1944년), 오스카르 코코슈카 등이 있는데, 그들은 회화가 실존하는 것을 그대로 그리거나 여기에 약간의 해석을 곁들인 '자연의 재생산'이 아니라,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정신과 영혼의 활동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표현주의 회화는 20세기 초 당시 현대인들의 긴장과 공포, 불안과 갈등, 그리고 잠재의식 속의 충동과 반항감 등을 표현한 것입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년 ~ 1944년)의 유명한 작품 《절규》(Der Schrei) 속의 주인공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즉, 불안하고 공포에 질린 표현주의적인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소리가 들어오는 귀를 두 손으로 막고, 입은 최대한 벌려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앞서 설명드렸던 '표현'이라는 단어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표현주의의 전성시대는 1910년부터 1925년 정도까지임을 고려해볼 때, 에드바르 뭉크의 1893년 작품인 《절규》는 표현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보기보다는, 표현주의가 시작되는 계기가 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절규 - 나무위키 (namu.wiki)/뭉크의 《절규》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인상Ⅲ (Impression Ⅲ) - 조선일보 (chosun.com)/칸딘스키가 1911년 쇤베르크의 《현악사중주》와 《3개의 피아노 소품》 등이 연주된 음악회에 다녀온 인상을 표현한 것이다. 무조성 음악의 시작을 알렸던 두 작품을 듣고 나서 느낌을 형상화한 이 그림에서 칸딘스키가 점차적으로 색채와 형태의 추상세계로 빠져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응형

 

표현주의 회화 양식은 점점 추상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림 속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되었습니다. 위의 작품은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으로, 선의 구성이나 기하학적 색조의 조화 등이 추상적으로 표현된 작품입니다. 이런 표현주의 운동은 단순한 예술적 활동의 범주를 분명하게 넘어선 정신적·사회적 활동의 일환이었으며, 현대인의 내면 세계를 표출하고 나아가 물질주의와 이데올로기의 분쟁에 대한 경고 기능까지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미술사조로부터 출발한 표현주의는 문학과 연극, 음악, 건축, 심지어 영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미술이나 문학과 마찬가지로 표현주의 음악에서도 당시 사회에 대한 반항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찾아가고자 하는 실험적 측면이 강했습니다. 표현주의 음악은 인간 내면세계의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을, 특히 인간이 겪는 심리적인 갈등과 긴장, 불안, 두려움, 그리고 잠재의식 속에 있는 충동 등을 표출하고 있는데, 기존의 것에 반항하는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찌그러진 추한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표현주의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이해하기가 어려움은 물론 거부감조차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제2 비엔나 악파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는 표현주의 회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또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려 청기사(Der blaue Reiter) 동인전에 출품하는 등 화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아놀드 쇤베르크는 그의 표현주의 음악작품들이 태동하기 직전이었던 1908~1910년 사이에 70여 편의 그림을 그렸으며, 1910년에는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당시 표현주의 화단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표현주의 미술이론을 정립시킨 이론가인 바실리 칸딘스키가 구체적인 그림을 완전히 버리고 형체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는 추상화에만 몰두하게 되는 시기와, 아놀드 쇤베르크가 조성을 완전히 버리고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무조성 음악을 작곡하게 되는 시기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아놀드 쇤베르크는 서로 절친한 사이였으며, 아놀드 쇤베르크 역시 화가로서 활동했던 만큼 표현주의 회화운동은 그의 음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놀드 쇤베르크가 표현주의와 무조성 음악을 택하게 되었을 때, 그의 제자 안톤 베베른과 알반 베르크 또한 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아놀드 쇤베르크와 두 제자는 1910년대에 이미 본격적인 무조성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나이로 따지면 아놀드 쇤베르크와 10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인간적으로는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작곡가로서의 이 두 제자는 그의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사제지간으로 맺어진 이 셋은 신봉하는 바도 강했을 뿐만 아니라 생시에나 사후에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삼위 일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이 활동했던 곳이 비엔나였기 때문에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으로 이어져 있는 비엔나 고전주의 전통에 비유해 '제2 비엔나 악파'(Second Viennese School)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