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제2 비엔나악파인 세 작곡가 중 아놀드 쇤베르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그가 이 표현주의 음악의 대표였기 때문에 다른 두 작곡가보다 분량이 많아 아놀드 쇤베르크는 세 개로 나누어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1. 아놀드 쇤베르크
1) 초기 작품들
아놀드 쇤베르크의 음악은 당시 유럽 후기낭만주의 음악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요하네스 브람스와 리하르트 바그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초기의 작품들에 낭만주의 음악어법을 사용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즉 앞에서 다루었던 요하네스 브람스의 '발전적 변형기법'을 터득한 아놀드 쇤베르크는 전체적으로 통일감 있는 악곡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반면 리하르트 바그너로부터는 불협화음의 자유로운 사용과 반음계적 화성 등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19세기의 마지막 해였던 1899년에 작곡된 현악 6중주곡 《정화된 밤》(Verklarte Nacht)은 여러 측면에서 후기낭만주의 사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음악이 기초하고 있는 리하르트 데멜(Richard Dehmel, 1863년 ~ 1920년)의 시 역시 그 시대의 세기말적 증상을 심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정화된 밤》이 나온 2년 후 작곡된 《구레의 노래》(Gurre-Lieder, 1901년)도 후기낭만시대의 반음계적 화성 뿐만 아니라 극도의 대형주의적 면모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구레의 노래》를 연주하기 위해선 다섯 명의 독창자와 해설자, 4개의 합창단,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필요한데, 그라우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놀드 쇤베르크는 《구레의 노래》에 이르러 악기의 편성규모와 악보의 복잡함에 있어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능가하고, 낭만적 표현의 격렬함에 있어서는 리하르트 바그너를 능가했다". 그러나 아놀드 쇤베르크는 곧 《정화된 밤》이나 《구레의 노래》에서 보여주었던 후기낭만주의의 음악어법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것에 대한 한계를 실감하였기 때문에 향후 작품들에서는 점차 무조성 음악으로 변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경부터 1912년까지는 그가 후기낭만주의자로부터 표현주의자로 변하는 과정, 즉 음악양식적으로 말하자면 반음계적 조성음악으로부터 무조성 음악으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작품에 이러한 면들이 반영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기낭만주의와 표현주의 사이에 교민과 방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1906년에 작곡된 《실내교향곡》(Kammersymphonie)입니다. 그가 작곡한 이 작품은 주로 후기낭만주의와 표현주의 사이의 양면거울이라고 표현됩니다. 거울의 앞면은 후기낭만주의의 복잡한 악보와 낭만주의 화성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을 의미하고, 뒷면에는 새로운 음향의 화음, 즉 전통적인 화성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조성을 향한 발걸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내교향곡》은 작곡한 뒤 7년 후, 1913년에 비엔나에서 초연되었는데,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거센 반발과 야유로 음악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당시 비엔나의 신문에서는 음악회장의 상황을 보도하면서, "한 마디로 이 작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것만으로 만들어진 복잡한 소리"라고 말했고, 또 다른 신문에서는 "공포의 실내 교향곡"이라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2) 무조성 음악의 시도
최초로 무조성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작품은 《현악사중주 제2번》(Op. 10, 1908년)의 마지막 제 4악장입니다. 이 외에도 연가곡 《공중정원의 책》(Das Buch der Hangenden Garten, 1909년)과 모노드라마 《기대》(Erwartung, 1909년) 등도 있는데, 이 작품들 모두 1910년 이전에 작곡된 작품들입니다. 《공중정원의 책》은 아놀드 쇤베르크가 좋아했던 슈테판 게오르그의 시집에 부친 연가곡인데, 그는 '새로운 생각의 표현과 형식으로 과거의 미학적 장애물들이 부서져 있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 혁신성을 평가했습니다. 아놀드 쇤베르크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낭만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는데, 전통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부서져서 새로운 틀 속에 담겨져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기대》는 마리 파펜하임(Marie Pappenheim, 1882년 ~ 1966년)의 대본에 음악을 붙인 4장으로 된 모노드라마로, 한 여인이 애인을 잃은 후 죽은 애인을 찾는 것을 묘사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무조성 음악이 청중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던 아놀드 쇤베르크는 표현주의적인 면모와 무조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청중의 호응을 얻어낼 수 있는 가볍고 풍자적인 악곡을 구상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작품이 앞서 몇 번 소개했던 《달에 홀린 삐에로》(Op. 21, 1912년)입니다.
3) 음렬기법의 태동
아놀드 쇤베르크는 조성음악의 자원이 완전히 고갈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그 대안으로 탄생한 무조성 음악은 기법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17년 이후 수년간 작품을 발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중에 그는 화가로서의 활동에 좀 더 몰두하고 있었지만, 192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신작발표의 공백기가 작곡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의 생각이 음악을 떠났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즉, 이 기간은 아놀드 쇤베르크의 미래음악에 대한 번민과 방향설정이 그만큼 심각했고 깊은 생각과 많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가령 1917년부터 1922년 사이에 간간히 작곡된 미완성 오라토리오 《야곱의 사다리》(Die Jakobsleiter), 그리고 1920년과 1923년 사이에 작곡된 《5개의 피아노소품》(Funf Klavierstucke) Op. 23 등에는 부분적으로 12음렬이 실험되곤 했습니다.
위의 보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아놀드 쇤베르크는 자유로운 무조음악 작품들에서 음렬기법을 실험적으로 사용했고, 그 실용가능성을 타진했던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21년 어느날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인 요제프 루퍼(Josef Rufer, 1893년 ~ 1985년)에게 "앞으로 100년 동안 독일 음악의 절대적 우월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토대로 보면, 1920년대 초엽에 이미 대체적인 방향이 이미 설정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음렬기법이었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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