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무조성과 음렬기법 6/7(2023.02.22)

작은대학교 2023. 2. 20. 18:00
반응형

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아놀드 쇤베르크의 제자이면서 제2 비엔나악파의 한 사람인 알반 베르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알반 베르크

 

1) 아놀드 쇤베르크와의 만남

.

출처 : 알반 베르크(1885 - 1935)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알반 베르크

1904년 10월, 스무 살이었던 청년 알반 베르크는 인생의 전기가 되는 시점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제2 비엔나 악파'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아놀드 쇤베르크와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세 사람을 필연적인 공동운명체로 묶으려고 하는데, 정작 이들의 만남은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무명의 작곡가였던 아놀드 쇤베르크는 신문에 작곡을 배울 학생을 찾는 광고를 내보냈는데, 바로 이 신문 광고를 접한 것이 알반 베르크와 안톤 베베른이었습니다. 이들 두 제자들이 중요한 나이에 스승을 만나게 되었음은 물론, 아놀드 쇤베르크에게 있어서도 양식적 변환기에 좋은 동반자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 사람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고뇌와 번민 등 많은 것들을 공유했다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알반 베르크에게 있어 아놀드 쇤베르크는 작곡 실기지도를 해주는 선생 이상이었습니다. 아놀드 쇤베르크는 그의 모델이자 상담자였고, 특히 4년 전 아버지를 잃었던 그로서는 아놀드 쇤베르크를 아버지와 같이 느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알반 베르크의 초기 작품에는 당연히 아놀드 쇤베르크의 영향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났습니다. 1905년부터 1908년에 걸쳐 작곡한 《7개의 초기 가곡》은 로베르트 슈만과 초기 아놀드 쇤베르크의 영향이 역력한 낭만주의 어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반 베르크는 이 작품을 습작으로 생각했는지 작품 번호를 부여하지 않았고, 1928년이 되어 개작해 출판하였습니다. 알반 베르크의 작품 1은 한 악장짜리 《피아노소나타》(1909년)인데, 여기서 주제를 발전시키고 변형시키는 방법을 보면 알반 베르크가 아놀드 쇤베르크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이미 흡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작품인 《4개의 가곡》(1909년 ~ 1910년) Op. 2은 프레드리히 헤벨(Friedrich Hebel, 1813년 ~ 1863년)과 알프레드 몸베르트(Alfred Mombert, 1872년 ~ 1942년)의 시를 노래로 만든 작품인데, 이 작품에서 조성이 모호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노래에는 플랫 기호가 6개나 붙어 있어, e♭단조의 조성임을 의미하고는 있지만, 모두가 복잡한 변화화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명확한 조성을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알반 베르크가 아놀드 쇤베르크의 지도를 받은 마지막 작품은 《현악사중주》(1909년 ~ 1910년) Op. 3인데, 여기서 알반 베르크는 이미 아놀드 쇤베르크로부터 모든 영양분을 흡수해 이제 자신 고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놀드 쇤베르크는 이 작품을 보고 이제 자신이 그에게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었음을 깨달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알반 베르크가 죽은 후 아놀드 쇤베르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현악사중주》는 나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대단한 걸작이며 창의적이다. 내가 베를린으로 떠난 후 베르크는 자신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알반 베르크의 《현악사중주》는 1911년 4월 24일 초연되었는데, 당시 신통치 않은 현악 4중주단이 결코 쉽지 않은 이 작품을 제대로 연주했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잊혀진 채로 묻혀 있다가 12년 뒤인 ISCM(International Society for Contemporary Music)음악제에서 다시 연주되었으며, 이 때 대단한 호응을 불러 일으켜 지금까지 걸작으로도 꼽히고 있습니다.

 

2) 1차대전과 오페라 《보체크》

 

1914년 5월 알반 베르크는 카를 뷔히너(Karl Georg Buchner, 1813년 ~ 1837년) 원작의 표현주의 연극 《보이첵》(Woyzeck)의 비엔나 초연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가 안톤 베베른에게 쓴 편지에 보면, 그는 즉석에서 이 연극을 오페라를 만들 것으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말로 알반 베르크는 카를 뷔히너의 《보이첵》 원본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개정판을 대본으로 택해 작곡을 했습니다. 카를 뷔히너의 드라마는 '사랑'과 '사회고발'의 내용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정치적·사회적 환경에 의해 이미 어느 정도 결정되어있는 한 감상적 성격의 군인의 심리를 소재로 다룬 것입니다. 

 

1914년 5월 베르크는 뷔히너(Karl Georg Buchner, 1813년 ~ 1837년) 원작의 표현주의 연극 《보이첵》(Woyzeck)의 비엔나 초연을 관람한다. 후일 베르크가 베베른에게 쓴 편지를 보면 베르크는 즉석에서 이 연극을 오페라로 만들 것을 결심했다. 베르크는 뷔히너의 《보이첵》 원본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개정판을 대본으로 택하여 작곡하였다. 뷔히너의 드라마는 '사랑'과 '사회고발'의 내용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내용이다. 그 내용에는 감성적인 성격을 지닌 군인이 자기 인생이 정치적·사회적 환경에 의해 이미 어느 정도 결정이 되어 있다고 느끼는 심리를 소재로 다룬 것입니다. 알반 베르크는 본래 3막으로 구성된 카를 뷔히너의 대본을 크게 압축했습니다. 음악 양식적으로 볼 때 《보체크》에는 전체적으로 무조성 양식으로 되어있지만, 음렬적 기법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1924년 여름, ISCM음악제에서 《보체크》의 관현악 모음곡은 절찬리에 연주되었는데, 당시 베를린 오페라단을 이끌고 있던 젊은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 1890년 ~ 1956년,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아버지)는 이 오페라를 무대에 올릴 것을 약속합니다. 반사회적 내용과 무조성적 음악어법을 담고 있는 《보체크》를 작곡한 알반 베르크에 대한 규탄과 이를 무대에 올리기로 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에 대한 해임 압력 속에서도 1925년 오페라 《보체크》는 예정되로 초연될 수 있었고, 그 이후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앞 다투어 공연되었습니다. 알반 베르크는 《보체크》를 통해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고, 이 오페라는 20세기 역사 속에 주요한 작품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서정적 모음곡》

 

《보체크》 이후 알반 베르크는 소수의 작품만을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건강이 약화되어 더 이상 무리하게 작곡을 할 수 없게 된 것도 있지만, 한곡 한곡 심혈을 기울여 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음렬을 사용한 작품으로 우선 꼽을 수 있는 작품은 현악 4중주를 위한 《서정적 모음곡》(Lyrische Suite, 1925년 ~ 1926년)인데, 이 작품에서 그의 음악적 특징들이 여러모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현악사중주로 연주되는 6개의 모음곡으로 되어 있는데, 빠른 악장과 느린 악장이 교대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4) 오페라 《룰루》와 베르크의 말년

 

1928년 알반 베르크는 프랭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 1864년 ~ 1918년)의 『룰루』(Lulu)를 바탕으로 두 번째 오페라를 쓰기로 작정하고, 오페라 대본을 직접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주인공 룰루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에게 매료된 모든 남자들을 파멸로 이끄는 여인이었다. 대본의 내용에 걸맞게 색소폰, 비브라폰 등 비전통적인 악기를 사용해 매우 감각적이고 또 퇴폐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오페라 《룰루》는 음렬기법을 사용해 작곡한 말기 작품으로 알반 베르크는 죽을 때까지 3막을 완성하지 못한 채 이 작품을 유작으로 남겨두게 됩니다. 그러나 알반 베르크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후일 총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연에 지장은 없었고, 그가 죽은 후인 1937년 6월 2일 취리히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알반 베르크가 《룰루》에 착수한지 7년이 지날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던 이유는 두 편의 다른 위촉 작품을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바이올린협주곡》(1935년)입니다. 이 작품은 18세에 소아마비로 죽은 마농 그로피우스(말러의 부인이었던 알마 말러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를 추모하기 위한 작품인데, 1악장은 마농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위한 케른텐 지방의 민요를 사용하여 느린 템포로 작곡되었고, 2악장은 고독한 마농의 투병을 상징하는 독주 카덴차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악장은 마농의 최후를 상징하는 느린 부분으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코랄 《이제 충분하도다》(Es ist genug)를 사용하여 작곡했습니다. 《바이올린협주곡》에도 음렬기법이 사용되지만, 조성적 작곡어법과 함께 쓰이기 때문에, 분위기에 따라 조성과 무조성을 번갈아 가면서 선택하는 아주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런 특징들은 바로 그의 개성이며, 이런 개성들 때문에 그의 작품은 그 누구의 아류도 아닌 알반 베르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양식을 성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알반 베르크는 1935년에 《바이올린협주곡》을 완성했지만 곧 죽었기 때문에 1936년에 이 작품이 초연될 때는 마농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했던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추모음악이 되어버렸습니다.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