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무조성과 음렬기법 5/7(2023.02.20)

작은대학교 2023. 2. 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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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쇤베르크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 중요한 음렬기법에 대해 설명드렸다면, 오늘은 조금 상대적으로 가벼운 그의 행보와 발언 등을 서술하겠습니다.


5) 미국으로의 이주와 후기 작품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과 소신있는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아놀드 쇤베르크의 행복기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 ~ 1945년)의 집권과 함께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이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카톨릭으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지만, 1933년 가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다시는 유럽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당시 미국은 유대인 혐오가 심각하기도 했었지만, 1940년대 이스라엘 문제로 유대인 차별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음). 미국에 도착한 아놀드 쇤베르크는 잠시 보스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되었고, USC의 교수를 거쳐 UCLA의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으며, 70세를 맞아 퇴임할 때까지 줄곧 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95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미국에서 작곡활동을 계속 하였습니다.

출처 : 다른 혹성에서 불어오는 바람,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194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작곡을 가르치고 있는 아놀드 쇤베르크

아놀드 쇤베르크의 고집스런 성격과 불굴의 정신은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해서 변할 리 만무했습니다. 음렬음을 사용했던 그의 작품들 중 초기의 작품은 대개 짧은 소품들이었지만, 점차 작곡의 한 방법으로서의 12음기법에 자신이 붙으면서 작품이 점점 길어지고 악기편성 또한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이올린협주곡》(1936년) Op. 36, 《피아노협주곡》(1942년) Op. 42 등 대규모 작품들까지도 모두 음렬기법을 사용해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아놀드 쇤베르크의 음렬적 기법은 그의 후기작품에 들어서 많이 완화되기 시작했고, 부분적으로는 조성을 느낄 수 있는 곳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의 음렬기법은 후기작품에서 보다 신축성 있게 적용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음렬적 사고의 기본 틀은 말년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6) 무조성 음악의 역사적 필연성에 관하여

 

아놀드 쇤베르크의 작품들은 그의 생애 말년까지 일반적인 청중들에게 호응받지 못했고, 이 현상은 최초의 무조성 음악이 작곡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왜 그는 무조성 음악을 고집했을까요? 무엇보다 그는 무조성 음악으로의 변화가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또 역사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그것은 음악양식 자체만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36년 아놀드 쇤베르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세상이 정상이었다면, 만약 1914년 이전과 같이 정상적이었다면 우리 시대의 음악도 다른 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아놀드 쇤베르크가 무조성 음악의 새로운 길을 택했던 것은 전통을 거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에 순응하기 위함이었으며 이에 대한 그의 역사적 소명의식은 신앙에 가까우리만큼 확고부동한 것이었습니다.

 

한 개인의 선택이 시대의 흐름 전체를 바꾸어 놓는 일은 역사 속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서양음악사에 있어서도 베토벤이 그러했고, 리하르트 바그너도 그러했습니다. 아놀드 쇤베르크 또한 서양음악의 역사에 흔히 등장하는 "중요한 개인"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고 해서 무조성 음악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이미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 속에서 무조성 음악을 향한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말러는 1909년부터 1910년 사이에 걸쳐 《교향곡 제10번》을 작곡하고 있었는데, 그 중 유일하게 완성된 2악장은 무조성 음악을 향한 발걸음을 보여주고 있고,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의 최후 5년간 작곡된 작품들 (1910년 이후의 작품) 역시 무조성 음악의 징후를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음렬음악에 있어서는 요제프 하우어(Joseph Matthias Hauer, 1883년 ~ 1959년)가  아놀드 쇤베르크보다 오히려 먼저 12음렬을 사용해 작품을 작곡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아놀드 쇤베르크가 아니더라도 무조성 음악과 음렬음악은 탄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나는 혁명가가 아니므로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한 일은 혁명도 아니고 무질서도 아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판단처럼 20세기 초엽의 음악 양식적 상황은 분명히 무조성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놀드 쇤베르크는 누군가 했었을 일을 본인이 앞장서서 함으로써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 그 '누구'의 역할을 스스로 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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