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무조성과 음렬기법 7/7(2023.02.24)

작은대학교 2023. 2. 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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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제2 비엔나악파의 마지막 인물, 안톤 베베른에 대해 알아보고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3. 안톤 베베른

 

1) 아놀드 쇤베르크와의 수업

 

출처 : 안톤 베베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안톤 베베른

안톤 베베른(Anton von Webern)의 본래 이름에는 'von(귀족)'이라는 이름도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그것을 떼어내 버리고 평민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책이나 악보에 그의 이름에는 그저 안톤 베베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안톤 베베른은 10살 즈음부터 첼로와 피아노를 배웠고 작곡도 조금씩 하기 시작했고 이후에 비엔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06년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인 하인리히 이삭(Heinrich Isaac, 1450년 ~ 1517년)의 《코랄리스 콘스탄티누스》(Choralis Constantinus)에 관한 연구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1904년 아놀드 쇤베르크를 만나고 난 후, 처음 1년간 쓴 그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그가 단시간 내에 아놀드 쇤베르크의 기법을 완벽하게 전수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안톤 베베른이 아놀드 쇤베르크에게 직접 배운 것은 불과 4년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사제지간의 신뢰와 친분은 평생 지속되었습니다. 안톤 베베른의 마음 속 깊이 아놀드 쇤베르크의 철학과 음악관이 상존하고 있었고, 그의 모든 작품 속에는 아놀드 쇤베르크로부터 터득한 기법들이 발전한 모습으로 담겨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놀드 쇤베르크의 직접적인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졸업작품'으로 안톤 베베른은 관현악을 위한 《파사칼리아》(Passacaglia)를 작곡했습니다. 그는 아놀드 쇤베르크의 문하에서 작곡된 습작들에는 작품번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그의 "작품 1"이 됩니다.

 

2) 베베른 음악의 일반적 경향

 

안톤 베베른의 작품은 대개 매우 짧고 간결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1913) Op. 10 중 한 악장은 19초 밖에 걸리지 않으며,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소품》(1914년) Op. 11 중 마지막 것은 10마디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안톤 베베른의 음악은 낭만시대의 대형화 추세와의 완전한 단절을 보여주고,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또한 아놀드 쇤베르크나 알반 베르크의 경우 무조성 음악에까지 나타나는 낭만주의적 어법의 잔재도 그의 음악에서는 철두철미하게 배제되어 있습니다.

 

안톤 베베른의 음악은 짧은 대신에 밀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려면 군더더기 없이 내용이 짜임새 있게 압축되어 있어야 하듯이, 그의 음악은 긴밀한 구성과 절제있는 표현력, 흠잡을 데라곤 없는 완벽한 형식감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고전주의의 정신입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던 아놀드 쇤베르크의 낭만적 성향이 알반 베르크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안톤 베베른은 아놀드 쇤베르크의 고전주의적 면모를 전수하여 극단적인 지점까지 몰고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이 밀도가 있다고 해서 음악 속에 많은 음을 사용했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압축해 전달한다는 것은 요점을 간략하게 하면서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간다는 뜻이지, 단순히 짧은 시간 내에 그저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톤 베베른의 악기 편성을 보면 독주나 소편성 악곡이 많고, 설사 대편성곡이라 하더라도 악보에 그리 많은 음들이 등장하지 않는 듬성듬성한 짜임새가 특징입니다. 교향곡이나 관현악 곡에서도 다같이 연주하는 총주(tutti)보다는 악기들끼리의 앙상블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 일부분만을 얼핏 듣고서는 그게 교향곡인지 실내악인지 정확하게 구분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면모들이 모두 아놀드 쇤베르크의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작품 경향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친 것은 바로 그가 대학을 다니면서 줄곧 연구했던 르네상스의 음악이라고 말합니다. 즉, 간결하면서도 짜임새 있고, 과장된 표현을 절제하는 것은 바로 르네상스 음악의 정신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안톤 베베른의 성악작품을 많이 작곡했다는 면, 그리고 대위법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은 바로 르네상스 아카펠라 음악의 영향으로도 보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안톤 베베른의 작품들은 어떤 관점에서 보든지 절대로 낭만주의의 연장선상에 올려놓고 볼 수 없다는 점이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진정한 현대음악은 아놀드 쇤베르크로부터가 아니라 안톤 베베른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역사관이 가능한 것입니다.

 

3) 초기작품

 

안톤 베베른의 초기 작품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관현악을 위한 《파사갈리아》 이외에도 《현악사중주를 위한 다섯 개의 악장》(1909년) Op. 5, 《관현악을 위한 여섯 개의 소품》(1910년) Op. 6, 《현악사중주를 위한 여섯 개의 바가텔》(1913년) Op. 9,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1913년) Op. 10과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소품》(1914) Op. 11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극도의 간결 명료성을 보여주는 그의 초기 작품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시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일깨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우선 음악 속에 반복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부분들도 없습니다.

 

음악적 짜임새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짜임새를 빽빽하게 메우는 데 습관된 당시의 사람들에게 아주 높은 음과 낮은 음을 사용하고 중간 음역을 비워놓는 그의 음악은 일종의 '공허감'을 주었습니다. 안톤 베베른의 음악적 직물이 갖는 한 가지 이점은 이러한 조직이 불협화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안성맞춤이라는 점입니다. 안톤 베베른도 다른 누구 못지않게 불협화음을 주로 사용했지만, 그의 음악에서 '불협'의 느낌은 아놀드 쇤베르크를 포함한 다른 현대작곡가들의 불협화음보다 훨씬 완화된 것처럼 들립니다. 이것이 안톤 베베른 특유의 짜임새와 악기편성이 주는 이점입니다. 2도나 7도 등 그의 음악에서 많이 사용되는 불협화음은 높은 음역과 낮은 음역으로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실제 악보 속에서는 9도나 그 이상의 음정으로 벌어져 있습니다. 또한 음역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악기로 연주되어도 자연히 음색도 달라지므로 불협화음이 주는 '부딪힘'의 느낌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그의 음악의 각 성부 선율들은 음들을 길게 끄는 경우가 없고 대개 짧은 음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혹여 부딪히는 듯한 느낌이 있다고 해도 아주 잠깐 부딪히고 마는 것 같은 효과를 주기도 합니다.

 

4) 음렬음악의 시대

 

1923년 아놀드 쇤베르크가 《5개의 피아노 소품》 Op. 23을 발표하고 난 뒤, 안톤 베베른은 스승이 발명한 12음 기법의 가능성을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안톤 베베른에게 있어 음렬이란 주제나 모티브를 만드는 재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음렬 그 자체가 모티브의 성격을 띠고 작품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확신을 가지고 음렬기법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13년 동안 기악곡은 손을 대지 않고 있다가 오랜만에 처음으로 작곡한 기악곡인 《현악삼중주곡》(1927년) Op. 20 역시 12음 기법으로 작곡된 중요한 작품입니다.

 

5) 나치의 집권과 베베른의 말년

 

안톤 베베른은 공적인 교육직을 맡은 일은 없었지만 작곡 개인지도는 많이 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12음 작곡의 길"(Der Weg zur Komposition in zwolf Tonen, 1932년)과 "현대음악의 길"(Der Weg zur neuen Musik, 1933년)이라는 두 가지의 강의를 해주었는데, 이 두 개의 강의록이 묶여져 1960년 『현대음악의 길』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의 정밀한 형식구조와 짜임새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배경이 합쳐져 나온 것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톤 베베른은 아놀드 쇤베르크와 마찬가지로 바로크 시대의 형식과 기법, 심지어 음악장르의 이름까지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실제로 2개의 칸타타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영향이 많이 보이고, 안톤 베베론 스스로도 《칸타타 제1번》의 한 악장을 가리켜 '변주곡을 기초로 하여 생겨난 형식이지만, 그러나 역시 푸가이다'라고 언급한 적도 있습니다. 두 번째 칸타타는 르네상스 미사와 비교해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9개의 악기를 위한 협주곡》(1934년)은 20세기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라고도 불립니다. 하지만 그의 신고전주의는 '과거로 되돌아갔다'는 인상은 주지 않습니다.

 

1933년 집권한 나치는 안톤 베베른의 작품 연주를 금지하고 그의 글들도 모두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는 몇몇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지도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아놀드 쇤베르크의 견해를 해설하는 강의조차 나치의 눈을 피해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한 음악전문 출판사(Universal Edition)에서 교정 일을 보면서 칩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곡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시가 삼엄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칸타타 제1번》(1939년) Op. 29,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1940년) Op. 30 등의 역작들이 잇따라 나오게 되었습니다.

 

안톤 베베른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직후, 미군의 총기 오발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의 음악을 열렬하게 찬미하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안톤 베베른이 죽은 날은 감수성이 넘치는 음악가에게는 애도의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안톤 베베른이 죽고 난 이듬해인 1946년 여름, 프랑크푸르트 근교의 도시 다름슈타트에서는 '신음악을 위한 다름슈타트 국제하계 강좌'(Die Internationalen Ferienkurse fur Neue Musik in Darmstadt)가 창립되었고, 그 후 이 여름학교는 매년 전 세계 작곡가들의 만남의 장이 되었습니다. 다름슈타트에 모였던 작곡가들이 추구했던 음악은 아놀드 쇤베르크의 음악과 같이 낭만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는 '적당히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었으며, 여기에 모인 작곡가들의 지표가 되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바로 안톤 베베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최 측은 1953년의 행사를 '베베른 추모 음악제'로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 다름슈타트에 모인 작곡가들은 안톤 베베른에게 '현대음악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붙여주었으며, 이 때 연주된 그의 작품들은 여기에 참석한 젊은 작곡가들에게 미래음악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무조성과 음렬기법 요약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비엔나는 커다란 정치적, 문화적 변동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는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모더니즘'이라는 20세기 문화의 주류를 탄생시키게 되었습니다. 음악적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한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무조성 음악'은 문자 그대로 조성이 없는 음악입니다. 무조성 음악은 1920년대부터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세 사람의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에 의해 본격적으로 작곡되었습니다. 또한 철두철미한 무조성 음악을 성취하기 위해 음렬기법 역시 고안되어 점점 더 난해한 음악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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