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20세기 초반의 음악적 상황 2/4(2023.01.27)

작은대학교 2023. 1. 27. 18:00
반응형

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지난시간에 이어 20세기 초반의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은 음악 이외의 분야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작곡가들의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3) 음악과 다른 예술 분야

 

20세기 초의 시각예술은 시대적 변화의 국면들을 자신의 작품에 날카롭게 반영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1907년에 그려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년 ~ 1973년)의 최초의 입체파(큐비즘, Cubism) 작품이었던 《아비뇽의 여인들》(Les Demoiselles d' Avignon)을 들 수 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로 대표되는 입체파는 인물이나 정물 등의 대상들을 특유한 입방체(cube)라는 기하학적 형태로 종합해 표현을 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20세기의 시각 예술가들이 대상의 정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그 움직임도 그림에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 상상할 수 없던 방법과 개념들이 미술의 소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듯이, 음악에서도 음 소재에 대한 확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작곡가들은 미분음 체계, 즉 반음보다 더 좁은 음정을 사용하는(쉽게 말해 반음의 반음) 세분된 음정체계를 사용해 작곡했습니다. 또 어떤 작곡가들은 청각예술은 악음 뿐만 아니라 소음까지도 포함시키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처 :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1907)
출처 : 미분음의 기호 - 히로시마 희생자 애가 - 바르게살자 (tistory.com)/미분음 표기 방법

그래서 과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소리, 즉 바람소리라든지 비행기의 엔진소리 같은 것들이 이제는 음악의 일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음향학적으로 주기가 일정한 소리를 악음(Tone, 울리는 소리)이라고 하고, 주기가 불규칙한 소리를 소음(Noise, 시끄러운 소리)이라고 하는데, 이 시대까지의 음악은 특별한 효과를 위한 부분들을 제외하면 오로지 악음으로만 곡이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하지만 1913년, 미래파 작곡가 겸 화가였던 루이지 루쏠로(Luigi Russolo, 1885년 ~ 1947년)는 이렇게 선언을 했습니다. "우리는 악음에 대한 우리의 좁은 고정관념을 깨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소음의 세계를 정복해야만 한다."

 

출처 : 루이지 루솔로 [Luigi Russolo]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루이지 루쏠로

한편 건축 부분에 있어서도 기존의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일대의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년 ~ 1969년)가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해 독일의 바이마르에 설립한 종합조형예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주된 이념은 예술과 기술을 통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건축한 바우하우스는 "건축물이 모든 시각예술의 궁극적 목표"라는 가치를 내걸고 예술적인 창작과 공학적인 기술의 두 개념을 통합해 건축이라는 것을 일종의 "총체예술"로 규정하였고, 이는 20세기의 건축과 회화, 조각, 디자인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사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극을 다루면서 등장했던 용어, 총체예술(또는 종합예술작품, Gesamtkunstwerk)은 본래 중세시대의 건축용어였습니다. 중세시대 건축의 종합예술작품이란, 성당을 지을 때 건물의 외형만 고려하지 않고 건물의 기둥과 유리창, 제단, 조각품, 벽화, 벽에 걸리는 성화 등이 모두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총체적인 예술작품을 이룬다는 의미인데, 바우하우스는 바로 이런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건축을 통한 조형예술의 통합을 꾀하였습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순수 미술과 응용미술의 차별을 지양하고, 산업과 접촉함으로써 현대 '디자인'의 개념을 정립해냈고, 이후에는 기능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출처 : Bauhaus Building by Walter Gropius (1925–26) : Bauhaus Building : Stiftung Bauhaus Dessau / Bauhaus Dessau Foundation (bauhaus-dessau.de)/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적 움직임은 건축에서 뿐만 아니라 상업미술, 실내장식, 심지어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접시, 향수병들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음악에 있어서 기능주의자로 대표될 수 있는 작곡가는 파울 힌데미트가 있는데, 그가 주장하는 실용음악(Gebrauchsmusik, 직역하자면 '필요성 있는 음악')은 단순히 듣기 위해 존재하는 음악이 아니라 다른 기능을 가지고 실제로 사용될 수 있는 음악을 말합니다. 예를들어, 아마추어 연주자들에게 필요한 쉬운 레퍼토리, 혹은 어린이들을 위한 소박한 극음악과 유희음악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음악이 음악 자체만으로서의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사회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파울 힌데미트와 몇몇의 독일 작곡가들은 일반 대중이 음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문학과 무용분야에서도 새롭고 다양한 기법들이 시도되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문학 분야에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년 ~ 1941년)나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년 ~ 1924년)의 소설, T. S. 엘리어트(Thomas Steans Eliot, 1888년 ~ 1965년)의 시와 같은 작품들은 현대문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또한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년 ~ 1950년), 유진 오닐(Eugene O' Neill,  1888년 ~ 1953년), 장 파울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년 ~ 1980년) 등의 희곡 작가들은 연극 공연장의 무대를 현실세계의 문제와 무의미함을 성토하는 자신들의 연단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문학과 음악이 합쳐져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년 ~ 1956년)와 쿠르트 바일(Kurt Weill, 1900년 ~ 1950년)의 합작품인 《세푼 짜리 오페라》(Dreigroschenoper)가 그 전형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 음악에서도 새롭게 유행하는 장르가 탄생했는데, 바로 재즈(Jazz)입니다. 재즈의 본산지는 유럽이 아닌 미국이었는데, 재즈가 미국에서 하나의 음악 양식으로 정립되자 쿠르트 바일을 비롯한 유럽의 작곡가들, 즉 파울 힌데미트, 모리스 라벨,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까지 관심을 갖게 되어 자신들의 작품에 재즈의 기법과 착상들을 적극적으로 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인들이 이 재즈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는 1920년대로, 이 시기에 많은 유럽이 작곡가들이 재즈의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재즈의 요소는 가벼운 음악 뿐 아니라 중후한 음악 속에도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재즈를 비롯한 민속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이 보급된 것은 레코드의 대중화 때문이었는데, 이로 인해 재즈가 절정을 이루는 것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블루스와 스윙 또한 급진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이런 추세가 계속되어 20세기 후반에는 록음악이 탄생하기에 이릅니다.

 

무용도 20세기 초에 들어서자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1872년 ~ 1929년)가 이끌었던 러시아 발레단의 유럽 공연을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 발레의 재해석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탁월한 흥행사이기도 했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무명의 젊은 작곡가였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에게 그의 발레 작품 《불새》(L' oiseau de feu, 1910년)를 위한 음악을 위촉하는데, 이 작품이 완성되어 초연되자, 클로드 드뷔시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이 환호를 보내었고, 이를 계기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유명한 작곡가에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하여 그는 그 이후에 《페트루시카》(Petrushka, 1911년),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1913년) 등의 작품들을 잇따라 내놓게 되는데, 이 작품들 모두 화제작이 되었습니다.

 

4) 작곡가들의 사회적 변화

 

20세기 작곡가들의 직장이면서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던 '대학교'는 각 분야별로 고도의 전문성을 띠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다양한 학문이 골고루 연구되는, 즉 전문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지니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특수한 환경 속에서 작곡가들은 획일성에 얽매이지 않고 고유의 전문성을 띠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을 했고, 또 대학 내에 있는 음악 이외의 다른 예술 분야나 기타 학문들로부터 자극이나 영향을 받아 이들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된 다양한 작품들을 실험하는 풍토가 조성되었습니다. 이전 서양음악의 역사 속에서 음악가들에게는 교회나 왕실, 귀족 등 여러 종류의 후원자들이 있어왔고, 또 이러한 후원체계 속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해왔던 작곡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20세기만큼 작곡가들이 작품의 완전한 자율성을 보장받은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작곡가들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을 위한 고민도 더욱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만큼 작곡에 소요되는 시간도 더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오 비발디는 협주곡만 500개 이상을 작곡했고,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교회에 봉직하는 동안 거의 매주 1편의 칸타타를 작곡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Don Giovanni)의 서곡을 작곡하는데 하루 저녁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요즘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도, 믿기도 어려운 일입니다.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놀라운 속도로 작곡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음악적 양식이 어느 정도 확고하게 나타나 있었던 것이 한 몫 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 통일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20세기의 작곡가들에 비해 훨씬 선택과 고민으로 부터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예를들어 작곡을 그림 그리는 것에 비유하자면, 요한 세바스찬 바흐나 모차르트에게는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어떤 대상과 기법들이 이미 통용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의 설정하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지만, 20세게의 작곡가들은 마치 추상화를 그리듯 작품의 거의 모든 부분들을 자기 자신의 판단력과 상상력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하여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폭넓은 취사선택권을 가지고 창작에 임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욱 실험적인 작품들을 창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곡가들이 후원자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경우, 자유로운 입장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용감한 실험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의 작곡가 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 1874년 ~ 1954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공한 보험사업가로, 작곡을 본업이 아닌 도락으로 삼아서 해왔는데, 낮에는 사업에 열중하고 저녁이나 주말을 활용해 작곡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용을 지불하여 자신이 작곡한 작품들을 연주하는 음악회를 열었지만, 연주자와 청중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작곡한 작품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그의 상황은 작품에 과감한 실험을 감행하는 것에 최적의 조건을 마련해 주었고, 결과적으로 향후 20세기 음악에서 주요 개념들로 등장하는 복조성, 무조성, 복합리듬, 미분음 등에 대한 실험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찰스 아이브즈(1874 - 1954)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찰스 아이브스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