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고전시대의 개관 3/5(2022.09.05)

작은대학교 2022. 9. 5. 18:00
반응형

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고전시대의 시대적인 환경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매번 시대적인 흐름을 짚고가는 이유는 이 때의 사회적 흐름과 음악적인 배경, 발전, 변화 등이 각각 영향을 받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흐름을 보면 음악적인 특징들을 유추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다소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이렇게 한 번 씩 짚고가는 것입니다. 그럼 고전시대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시대 환경

 

1) 계몽주의

 

고전시대의 사회는 음악적인 단아함의 추구가 아닌 변혁의 시대였습니다. 이때 유럽은 나라간 문물 교류가 증대하고 있었고, 권력 가문들 사이에 국제적인 결혼이 잦았기 때문에 결국 유럽의 주요 열강들이 하나의 거대한 통 속에 들어온 형세가 되었습니다. 서양의 세력 판도를 뒤흔든 국제전 양상의 7년전쟁(1756년 ~ 1763년), 그리고 서양 사회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이 변화에 박차를 가하게 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민사회의 등장입니다. 이 시민사회의 등장으로 창작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 의식을 갖춘 계층이 점점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기악음악을 위한 공공 음악회도 자리를 잡아 더욱 증대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계몽주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계몽주의는 비이성적 권력 체계에 반대하는 미국의 독립선언(1776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고,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는 예술관이 만들어지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계몽주의는 인간 스스로의 분별력으로 자유에 바탕을 둔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지식의 발견과 지식의 축적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데니스 디드로(Denis Diderot, 1713년 ~ 1784년)와 장 르 롱 달랑베르(Jean Le Rond d' Alembert, 1717년 ~ 1783년)등과 같은 백과사전파가 등장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 중에서 가장 고전시대와 관련해 돋보이는 사람은 바로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년 ~ 1778년)입니다. 그는 음악의 인위성에 반대하고, 음악의 자연스러움을 추구,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이탈리아어에 의한 선율적인 노래를 프랑스어에 의한 이지적인 노래들보다 더 나은 것으로 생각했고, 중후한 프랑스 오페라의 전통보다는 가벼운 오페라 부파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계몽주의에 의한 서양의 사회적 변화는 인간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고, 이는 음악을 향유하는데 있어서도 지역을 뛰어넘어 수용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로크시대를 이탈리아의 음악이 두드러졌던 시대라고 한다면, 고전시대는 지역적으로 다양한 양식들이 나타나는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시대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지역의 색을 뛰어 넘는 혼합 양식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음악 산업의 판도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탈리아의 전통 오페라와 음악가들이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여전히 환영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어권의 기악음악이 다른 나라에도 수출되는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런 흐름은 인간의 공통적인 예술 인식에 부응해 기악 언어로 시간과 지역 및 계층을 아우르는 고전적 음악이상이 자리를 잡게 했습니다.

 

2) 민중의 교육

 

당시에 활동하던 사상가들은 단순히 철학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사회적인 변혁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개혁가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의 발언은 곧 민중 계몽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교육을 통한 인간의 개화에 희망을 거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계몽주의의 선구자로는 볼테르(Voltaire, 1694년 ~ 1778년), 바론 드 라 브레드 에 드 몽테스키외(Baron de La Brede et de Montesquieu, 1689년 ~ 1755년), 장 자크 루소 등의 프랑스 사상가들의 뒤를 이어서 고트홀드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년 ~ 1781년),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년 ~ 1805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 1832년) 등의 독일 문학가들은 교육을 통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큰 관심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쉴러는 사회의 건전화와 자유로운 인간의 육성을 연계시킬 수 있는 미적 교육을 주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년 ~ 1827년)는 교육 이론가 겸 실천가로서 머리와 가슴, 손을 고루 조화시킬 수 있는 전인교육을 제시했고, 말하기와 쓰기, 셈하기, 그리기 등 기본 활동과 더불어 음악(노래하기)을 기초 교육의 중요 영역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교육해 "스스로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려는 그의 사상은 계몽주의의 저변 확대 운동과 다를게 없었습니다. 민중의 개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 러시아의 예카트리나 대제,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 등, 소위 계몽군주라 불리는 그들은 개별적인 사안들을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큰 틀에서 들여다 보면 이러한 계몽주의적 흐름에 동참한 사람이었습니다.

 

민중 계몽의 주요 수단으로 예술을 조명하는 작업에서는 예술이 지닌 본질적인 순수성이 그 출발점으로 작용합니다. 이 맥락은 장 자크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이나 프리드리히 쉴러의 미적 교육, 그리고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 1744년 ~ 1803년)의 민요 연구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런 사고는 단순성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음악 이상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위적이면서 조작된 기법적인 음악을 뛰어넘어, 본질적이고 자연적인 음악이 선호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모차르트의 음악들은 이러한 음악적 고전의 이상에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자주 평가받고 있으며, 음악을 통한 일반적인 교육의 주요 수단으로도 자주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반응형

 

3) 음악 수요층의 확대

 

시민 계급의 증가와 음악을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음악의 종류와 연주회의 형태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중산층이 증가한 것에서 기인합니다. 이전에는 교회나 궁정에서 소수의 지배층을 염두에 둔 음악적인 활동이 주류였지만, 이제는 경제적인 여유와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음악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기존의 오페라 공연과 더불어 대규모의 기악곡을 연주하는 공공 음악회를 통해 사회 전반의 문화 경향이 바뀌어 가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주변 지인들을 위한 소규모 살롱 연주회나 일반 가정에서의 소규모 음악회가 양적인 면에서 궁정이나 귀족층을 대상으로 했던 실내악 못지않게 성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음악 수요자의 상당수는 스스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아마추어 음악가들이었습니다. 당대 유명한 음악가들은 그런 수용층들을 대상으로 음악 레슨을 해주었고, 이를 통해 생계의 일부분을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반면, 아마추어 음악가들은 뛰어난 음악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음악 인구의 저변 확대는 한편으로 음악 경향과 수준의 다양화를 촉진시켰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의 보급과 연구를 촉진시켰습니다. 이를테면 여가 시간을 가지게 된 중산층들은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음악을 원했고, 이 사람들을 겨냥한 상업적인 악보의 제작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사업성을 담보해줄 수 있는 건반악기용, 소규모 실내악용, 노래용 악보들이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또한 음악을 더 알고싶어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읽을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연주회의 평이나 작품 해설 기사들이 청중에게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음악에 대한 경탄을 전면에 내세우는 열광적인 청중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음악의 위상이 높아져서 이제는 음악이 예술로서의 위치가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연주기법의 숙달을 통해서 음악의 섬세한 표현력을 증가시킬 수 있는 일은 악기교본의 출판을 통해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클라비어 연습교본(1753년)을 쓴 C.P.E. 바흐, 바이올린의 대표적인 연습교본(1756년)을 낸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 1719년 ~ 1787년), 그리고 플루트 연습교본(1752년)을 집필한 크반츠(Johann Joachim Quantz, 1697년 ~ 1773년)가 18세기 후반에 활동했습니다. 반면 피아노를 위한 연습교본이 이것보다 더 뒤에 나온 이유는,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한 역량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이 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이후에는 요한 네포묵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년 ~ 1837년)의 『피아노 연주에 대한 자세한 이론적 실제적 안내』(Ausfuhrliche theoretisch-practische Anweisung zum Piano-Forte-Spiel)가 1828년에, 카를 체르니(Carl Czerny, 1791년 ~ 1857년)의 『완성된 이론적 실제적 피아노 교본』(Vollstandige theoretisch-practische Pianoforte-Schule, OP. 500)는 1838년 경에 출판되었습니다.

 

4) 음악 연구의 촉진

 

음악에 대한 보다 폭넓은 지식의 추구는 음악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을 촉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작곡가와 작품의 연구, 그리고 그것들을 엮어서 전체적인 음악사를 서술하는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계몽주의를 선도했던 프랑스어권의 백과사전파에 의해 점점 더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술, 기술의 백과사전 또는 체계적 사전』(Encyclopedie ou dictionaire raisonne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etier, Paris, 1751년 ~ 1772년)에서 드니 디드로와 장 르 롱 달랑베르가, 『음악 사전』(Dictionaire de musique, Geneve, 1768년)에서는 장 자크 루소가 음악에 관한 것을 집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지오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Giovanni Battista Martini, 1706년 ~ 1784년)의 『음악 이야기』(Storia della musica, 전 3권, Bologna, 1757년/1770년/1781년)와 안토니오 엑시메노(Antonio Eximeno, 1729년 ~ 1808년)의 『음악 규칙의 기원에 대하여』(Dell origine e delle regole della musica, Roma, 1774년)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실제 음악을 중심으로 서술된 음악사는 아니지만, 18세기 후반 음악 연구 중흥에 기여했던 문헌들입니다.

 

존 홉킨스(John Hawkins, 1719년 ~ 1789년)의 『음악의 학문과 실제에 대한 일반사』(A General History of the Science and Practice of Music, 전 5권, London, 1776년)와 찰스 버니(Charles Burney, 1726년 ~ 1814년)의 『음악 일반사』(A General History of Music, 전 4권, London, 1776년 ~ 1789년)는 음악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서적입니다. 후세에 바흐의 연구가로 더 많이 알려진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 1749년 ~ 1818년)의 『음악의 일반사』(Allgemeine Geschichte der Musik, 전 2권, Leipzig, 1788년 ~ 1801년 미완결) 또한 같은 흐름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서적입니다.

출처 : 음악사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포르켈의 『음악의 일반사』 표지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심설당.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