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고전시대 성악음악 중 오페라 장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고전시대의 성악음악의 다른 장르인 교회음악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음악은 바로크 시대에 비해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요소들을 첨가함에 따라 고전시대의 분위기에 맞춰 발전하였습니다. 그럼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5) 교회음악
① 미사
전통적인 가톨릭 예배 음악인 미사는 18세기 중엽까지도 의식음악으로서의 기능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1749년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트리엔트공의회의 결정에 기초해 화려한 교회음악을 억제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례적인 가사가 이해될 수 있어야 하고, 오페라처럼 극적 요소를 배제해야 하며, 교회 내에서 트럼펫이나 플루트, 팀파니 등의 일정한 관악기와 타악기를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성탄절을 앞두고는 악기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들은 고전시대에 들어서 그대로 준수되지 않았고,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연주가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교회음악이 점점 세속적인 음악 요소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점차 원래의 전례적 기능보다는 음악적 표현의 한 수단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고전시대 작곡가들은 오케스트라 반주의 교회음악을 통해서도 예술적 이상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적 양상에도 불구하고 무반주 합창이라는 옛 양식의 형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옛 양식만을 고집하는 작곡가도 거의 없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의 작곡가들은 그 시대의 취향에 맞는 여러 가지 형태의 교회음악을 복합적으로 창작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미사 음악에서 전례의 위상에 따라 곡의 규모와 악단 편성을 조절했는데, '장엄 미사'(Missa solemnis)에서는 보통 전체의 오케스트라가 참여합니다. 반면 '작은 미사'(Missa brevis)에서는 편성의 규모가 작고 길이도 훨씬 짧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섞은 장대한 미사 음악들은 고전시대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모두에게서 표본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고전시대의 이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사고를 바탕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속적인 음악 어법이 교회음악에서 특별한 제약을 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고전시대를 형성했던 이들의 활동에 제도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시기는 고전시대적인 사고의 배경이 되는 계몽주의적 접근이 황제 요제프 2세에 의해 역으로 문화 개혁을 표방하게 했을 때입니다. 모든 사치에 반대했던 그의 칙령은 교회음악의 장대함을 금지했고, 라틴어로 된 난해한 미사 대신에 쉬운 독일어 노래들을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1790년, 이 칙령이 해제될 때까지 비엔나에서의 화려한 교회음악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정확한 작품의 수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하이든은 약 10여개의 미사를 작곡했고, 모차르트는 약 20여개에 가까운 미사를 작곡했습니다. 하이든은 영국을 다녀온 뒤, 오라토리오 기법을 접목시킨 큰 규모의 미사들을 작곡했습니다. 모차르트는 대부분의 미사곡들을 잘츠부르크의 교회를 위해 작곡했으며, 생의 말에 《레퀴엠》을 작업하다 미완성으로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음악가로서 공적인 직책을 갖고 있지 않았던 베토벤은 당시 개혁적인 비엔나의 분위기에 맞춰 교회음악 분야에 적은 수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베토벤은 《C장조 미사》(1807년)와 《장엄미사》(1819년 ~ 1823년)를 남겼습니다. 그의 《장엄미사》는 전례적인 기능을 탈피해 연주회용 음악의 성격을 가지게 된 작품입니다. 그는 이 미사 작품의 일부를 그의 9번 교향곡과 함께 일반 공연장에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비엔나의 주교에서 교회음악의 세속적 연주를 반대했기 때문에, 베토벤은 연주할 곡들을 '장엄미사'라는 이름이 아닌 '찬가들'(Hymnen)로 바꾸어서 연주해야 했습니다.
베토벤의 장엄 미사는 성악의 음향을 기악과 엮어 가사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대규모 음악작품 가운데 규모나 내용 면에서 단연 독보적인 작품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미사 통상문의 가사를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그것에 의존하지도 않는 독자적인 음향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 피날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장엄미사는 그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의 대주교 취임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작곡된 작품입니다. 하지만 대주교의 취임식은 베토벤의 음악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여 이 곡의 초연은 1824년 4월 7일 페테스부르크의 음악협회 주관으로 연주되었고, 같은 해 5월 7일, 9번 교향곡의 초연 때 글로리아와 상투스를 제외한 나머지를 비엔나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함께 연주하였습니다. 베토벤이 사망한 뒤, 1830년에 바른스도르프(Warnsdorf)의 성 베드로 및 바오로 교회에서 장엄미사가 처음으로 전례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② 오라토리오
18세기 전반에 작곡된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오라토리오의 작곡가들이 대부분 오페라 작곡가였기 때문입니다. 오라토리오 작곡가들이 대부분 오페라 작곡가였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오페라 세리아의 대본가들이 오라토리오의 대본도 썼기 때문입니다.
오라토리오도 오페라처럼 기본적으로 이탈리아의 전통이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중엽이 되어 도식적인 구성에 대한 비판이 일었고, 이와 함께 새로운 작곡 양식이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우선 대본의 구성에서 성경의 자구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해석적 내용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이었고, 또 자국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특히 독일어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 요한 아돌프 샤이베(Johann Adolf Scheibe, 1708년 ~ 1776년), C.P.E. 바흐 등이 있습니다.
고전시대의 대표적 오라토리오는 하이든의 작품입니다. 하이든은 1791년 런던의 헨델 기념제에서 《메시아》(Messiah)와 《이집트의 이스라엘》(Israel in Egypt)을 듣고 감명을 받아 오라토리오 작곡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작곡했던 첫 오라토리오의 대본은 존 밀턴(John Milton, 1608년 ~ 1674년)의 『실락원』을 개작한 《천지창조》(Die Schopfung)입니다. 고전시대 기악어법에 능숙했던 하이든은 이 작품(1798년)에서 교향악적인 음향에 영국 전통의 풍부한 합창 음향을 결합시키기도 했습니다. 3년 뒤에 작곡한 《사계》(Die Jahrezeiten)는 각 부분이 사계절을 나타내고는 있지만, 일관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에 웅장한 오케스트라 반주를 가진 세속음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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