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하이든의 교향곡에 대해서 알아볼 예정입니다.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왜 불리는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하이든
① 교향곡 작곡의 시작
하이든은 약 1760년경부터 교향곡 장르를 작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기에 그는 이탈리아 전통의 서곡에 만하임과 비엔나 전통의 교향곡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그가 일을 했던 에스테르하지 가의 별궁인 에스테르하자(페르퇴드)에서 그는 20명 안팎의 오케스트라와 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을 활용하였습니다. 밝고 경쾌한 연회용 음악에 준하는 그의 초기 교향곡들은 때때로 협주곡적(콘체르탄테, concertante)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오케스트라에는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와 첼로 연주자가 있었기 때문에 주로 바로크 시대의 콘체르토 그로소에 가까운 연주 형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교향곡들 중에는 일부 단조 작품들이(39번 e단조, 44번 e단조, 45번 f#단조, 46번 c단조) 있는데, 당시에 유행했던 감정과다 양식이나 질풍노도 양식에 영향을 받아서 작곡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교향곡이 독특한 색깔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주제-동기 가공작업을 통해 전성기 고전시대를 열게 된 1780년대입니다. 그는 현악사중주에 뿐만 아니라 교향곡에서도 설정된 주제적 요소와 동기들을 집중적으로 가공해 발전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탄탄한 소나타형식의 구조가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악장의 길이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집중성이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악장 길이의 증가는 주제-동기 가공작업의 필요조건임과 동시에 충분조건이 된 셈입니다. 하여 이 시기부터 트리오를 포함한 춤곡 악장이 네 악장 체제의 교향곡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고전적 교향곡은 에스테르하지 가의 여흥적 음악의 범위를 넘어서 작곡된 작품입니다. 소위 "파리 교향곡"(82-87번)이라고 불리는 여섯 작품의 교향곡은, 당시 파리의 프리메이슨 조직인 올림픽 동맹의 연주회(Concerts de la loge Olympique)를 위해 작곡된 작품들입니다. 하이든은 이런 지식층의 청중을 상대로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본격적인 고전 어법을 펼쳐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파리의 이 단체는 당시로서 굉장히 큰 규모인 60여 명의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하이든의 교향악적 기법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② 교향곡 창작의 절정
하이든 교향곡의 최대 절정은 소위 '런던 교향곡들'(93번-104번)이라고 불리는 작품에서 나타났습니다. 이 작품들은 느린 도입부에 이은 빠른 1악장에서 고전시대의 중심적 기악어법인 주제-동기 가공작업을 통한 소나타형식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느린 2악장과 미뉴에트 3악장 뒤에 빠른 4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이나 론도, 푸가 등을 섞은 형태를 사용하였습니다. 순환적 4악장체제의 소나타를 오케스트라에서 구현한 이 작품들은 이후 고전시대 교향곡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이 교향곡들의 창작시기는 하이든이 30년을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를 떠나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이든을 에스테르하지 가에 고용했던 파울 안톤(Paul Ⅱ. Anton Esterhazy, 1714년 ~ 1790년)은 바리톤을 연주했던 뛰어난 음악가였고, 음악을 향유하기 위해 에스테르하자를 건설을 추진했던 당사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사망하고 난 뒤, 새로 영주가 된 안톤(Anton Esterhazy, 1738년 ~ 1794년)은 오케스트라의 유지비용이 비쌌기 때문에 해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안톤이 음악에 큰 흥미가 없고 유지비가 비쌌기 때문에 오케스트라를 해체시키고 하이든을 해고한 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하이든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고전적 음악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안톤은 하이든에게 충분한 연금과 명예 음악 감독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여 그가 전 유럽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음악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미 퍼진 하이든의 명성을 감안한다면 에스테르하지 오케스트라의 해체는 하이든에게 해고가 아닌 영전의 의미가 됩니다. 하이든은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음악 세계를 더 널리 펼치고자 영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다음 영주가 된 니콜라우스 2세(Nikolaus Ⅱ. Esterhazy, 1765년 ~ 1833년)가 다시 부르자,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가로 가서 영주의 취향대로 교회음악의 작곡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이든은 비록 궁정의 신하로 근무했지만, 에스테르하지 가의 범위를 넘어선 음악적 사고 덕분에 보편적 음악어법의 구현을 일궈낼 수 있었습니다. 파리의 프리메이슨 교향곡 위촉과 영국으로의 음악 여행은 하이든에게 있어 매우 의미있는 계기였습니다. 물론 러시아 대공에게 헌정했던 현악사중주(Op. 33)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에 걸친 런던의 교향곡 연주회는 대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서와 같은 공개 연주회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테르하지 가에서의 연주회나 파리의 올림픽 동맹 연주회는 다수의 청중을 상대로 한 연주회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전할 수 없는 폐쇄적인 연주회였습니다. 때문에 연주회의 성공이라는 의미가 일반적인 평판이라기 보다는 참석자나 후원자의 견해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릴 수 있는 공개 연주회는 대중적인 매체를 통해 작품의 정보와 평을 공유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오페라의 상연에 대비되는 당시의 이런 오케스트라 음악회들은 '연주회'(Concert/Konzert), '아카데미'(Akademie), '교향곡의 밤'(Symphonie-Soiree), '예약 연주회'(Abonnementskonzert) 등의 이름들로 개최되었습니다. 물론, 오케스트라 음악 말고도 앙상블이나 성악 작품들이 섞여있을 수 있지만, 대개 기악 작품이 함께 연주된다는 안내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음악 아카데미라는 개인의 음악회를 열어 자신들의 연주를 보기 위해 어느정도의 금액을 지불하고 온 유료 청중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음악회 기획가로 잘 알려져 있는 살로몬은 하이든 교향곡 연주회를 2년에 걸친 '예약 음악회'의 형태로 두 번(1781년 ~ 1792년/1794년 ~ 1795년)진행하였는데, 런던의 연주회는 시즌이 매년 상반기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여 매 시즌마다 세 곡의 새로운 교향곡 작품이 소개되었습니다. 연주회장의 정원은 800명 정도였는데, 하이든의 음악에 대한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에 그 배에 가까운 청중들이 연주회장에 입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연주회의 시간은 휴식시간을 포함해 약 3시간이었습니다.
하이든은 2차 런던 연주회를 위한 교향곡(99번)에서 클라리넷을 편성에 넣었습니다. 또한 그는 《군대 교향곡》(100번)에 트럼펫과 팀파니를 도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당시 터키 음악으로 불렸던 트라이앵글, 심벌, 큰 북 등의 타악기의 음향을 도입하였습니다. 또한 팀파니의 큰 울림('놀람')을 활용하거나, 영국의 춤곡 선율을 주제(《군대 교향곡》 4악장)로 사용하는 등, 새로운 요소들을 교향곡 안에 적극적으로 넣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의 후기 교향곡에 나타난 기법과 사고의 자유로움은 이후 베토벤 교향곡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향곡에서 전체 악장에 나타난 주제-동기 가공작업의 확대, 소나타형식의 정형화와 중용, 순환적 악장 구성을 통한 작품 전체의 유기성 강화를 구체화하였고, 이런 음악이 일반 청중들을 향한 공공 연주회의 중심 장르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하이든의 교향곡은 고전시대 기악어법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전시대의 음악적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츠 요세프 하이든 | |
1732년 | 3월 31일 오스트리아 동부의 로라우(Rohrau)에서 출생 |
1740년 ~ 1749년 | 비엔나의 성 스테판 대성당의 성가대원, 로이터(Georg Reutter, 1708년 ~ 1772년) |
1750년 | 성가대원을 그만 둔 뒤 비엔나에서 음악교습과 연주 및 작곡을 함 |
1753년 |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Porpora, 1686년 ~ 1768년)의 보조 반주자, 비엔나의 여러 작곡가들과 접촉함 |
1757년 ~ 1759년 | 모리친(Karl von Morzin) 백작의 음악감독. 1번 교향곡 |
1760년 | 마리아 켈러(Maria Keller)와 결혼(뒤에 이혼함) |
1761년 | 에스테르하지(Esterhazy) 가(家)의 부음악감독이 됨 |
1762년 | 현악사중주 1번 작곡 |
1766년 | 선임자의 사망 이후 음악감독이 됨 |
1772년 | 《고별 교향곡》. 음악궁정음악가로서의 충실한 직책 수행 |
1781년 | '러시아 현악사중주'(Op. 33), 고전 양식의 성립 "새롭고 독창적인 방식" |
1784년 | 모차르트와의 친교 및 상호적 영향 |
1785년 ~ 1786년 | 올림픽 동맹 음악회를 위한 '파리교향곡'(82번-87번) |
1788년 ~ 1789년 | 《옥스퍼드 교향곡》(명예 박사학위 축하곡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 |
1791년 | 에스테르하지 가의 오케스트라가 해체, 명예 음악감독으로 자유로운 음악 활동,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학위 받음 |
1791년 ~ 1792년 | 음악회 기획가인 살로몬 요청의 1차 영국 방문(20개월), 초기 '런던 교향곡' 6곡(94번 《놀람》, 96번 《기적》 포함) |
1792년 ~ 1793년 | 베토벤을 만나 지도함 |
1794년 ~ 1795년 | 2차 영국 방문(18개월), 후기 '런던 교향곡'(100번 《군대》, 101번 《시계》, 104번 《살로몬》 포함) |
1795년 | 에스테르하지 가의 음악감독으로 복귀, 교회 음악에 집중함 |
1797년 | 전쟁 중 <하느님이 보호하도다 프란츠 황제를> 작곡(현악사중주 Op. 76, 3의 2악장 변주 주제) |
1798년 |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
1801년 | 오라토리오 《사계》 |
1803년 | 마지막 작품 현악사중주(Op. 103) |
1809년 | 5월 31일 전 유럽의 존경받는 작곡가로 비엔나에서 사망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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