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바로크시대의 성악음악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에 대해 알아보고, 지난 시간에 다루었던 오페라의 변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 시대의 마드리갈 작곡가로서도 활동했었는데, 바로크 시대의 기점으로 간주되는 1600년대에도 이미 동시대의 지도적인 작곡가로서도 인정받으며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혁신주의자이었기 때문에 현대음악의 창시자로도 묘사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양의 마드리갈 작품들을 작곡하고 출판했던 그는 오페라라는 장르가 탄생한 후에 가장 먼저 오페라를 작곡한 첫 오페라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첫 번째 오페라 《오르페오》(L' Orfeo)는 1607년 만토바에서 연주되었는데, 그 오페라의 줄거리는 야코포 페리의 작품 《에우리디체》의 줄거리와 동일합니다. 그 줄거리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 그들은 그리스 신화 속의 연인이었으며, 이들의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지극한 사랑을 상징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 작곡가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았던 작품입니다. 그래서 줄리오 카치니와 야코포 페리부터 고전시대의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년 ~ 1787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졌습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 |
1567년 | 크레모나에서 5월 15일 출생 |
1587년 | 마드리갈 제 1집 발간 |
1591년 경 | 만토바의 곤자가(Gonzaga)궁정의 현악기 주자 |
1600년 |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확고해짐 |
1601년 | 만토바 음악감독(maestro di cappella) |
1607년 | 만토바에서 《오르페오》공연, 부인 클라우디아 사망 |
1608년 | 《아리아나》(L' Arianna): 크레모나로 귀향, 곤자가에서 떠나려고 노력 |
1610년 | 《저녁기도》(Vespers) 출간 |
1613년 | 베네치아 성 마르코 성당 음악감독 |
1619년 | 마드리갈 제 7집 발간 |
1620년 ~ 1628년 | 오페라 《Commento d' Apollo》, 《La finta PazzaLicori》(미완성), 《Mercurio e Marte》(소실) |
1638년 | 『사랑과 전쟁의 마드리갈』(마드리갈 제 8집) 발간 |
1640년 | 오페라 《율리씨즈의 귀향》 |
1642년 |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식》 |
1643년 | 베네치아에서 11월 29일 사망 |
오페라 《오르페오》에 사용된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르페오는 자신의 노래로 바위를 녹이고, 야수들을 길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위대한 가수입니다. 그의 아내 에우리디체는 들에서 꽃을 따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뱀에 물려 죽게 되었고 오르페오는 절망에 빠져 그녀를 따라 지하세계에 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음악의 힘으로 그녀를 지상에 데려올 수 있도록 지하의 신 하데스를 설득하여 데리고 지상으로 왔지만, 도착 직전에 그녀를 돌아보지 말라는 플루토의 조언을 어기면서 그녀를 다시 잃게 됩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이런 기본적인 줄거리의 비극적 결말을 조금 변형시켜서 작품에 적용시켰지만, 그럼에도 초기 오페라의 일반적인 윤곽을 따랐습니다. 따라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는 프롤로그와 5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마드리갈과 모노디양식의 아리아, 그리고 피렌체 오페라보다는 적은 양이긴 하지만, 좀 더 연속성이 주어져 있는 레치타티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는 그 이전의 오페라보다 더 극적이고 음악적으로도 더 복잡합니다. 그는 곡의 다양성과 음색을 위해서 순수한 기악적 부분인 서곡(토카타라는 이름으로)과 리토르넬로(기악적 서주나 간주곡을 의미)를 편성하였습니다. 그가 쓴 악보에는 40여개의 다양한 악기가 편성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편성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많은 것입니다.
모노디양식의 독창선율은 더더욱 다양해졌습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민감하게 가사를 취급하는 것에 더욱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표현력이 풍부한 선율을 작곡했습니다. 특히 그는 독창성부들의 장식과 변주들을 즉흥적인 연주에 맡기지 않고 모두 기보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악보는 때떄로 복잡해서 3막의 한 아리아는 6개의 리토르넬로와 함께 각 절마다 다른 반주를 하기도 합니다.
① 로마 오페라
세속궁정이 없던 로마에서는 1620년 경이 되어 오페라가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의 로마는 교황령(Stati della Chiesa, 752년 ~ 1870년)의 수도였고, 고위성직자들의 여흥을 위해 오페라가 정착했습니다. 로마에서는 신화 중심의 내용으로 구성된 오페라가 여전히 우세했지만 기독교의 성자들을 위한 대본이나 기사도적 시도 극화되었습니다.
피렌체 카메라타의 일원 중 한명이었던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Emilio de' Cavalieri, 1550년 ~ 1602년)는 로마에서 종교적인 내용이 담긴 《영혼과 육체의 극》(Rappresentatione di Anima, et di Corpo, 1600년)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최초의 로마 오페라이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오라토리오의 기원으로도 간주됩니다. 이 외에도 독특한 로마 오페라로는 스테파노 란디(Stefano Landi, 1586년 ~ 1639년)의 오페라 《성 알렛시오》(Sant' Alessio, 1632년)가 있는데, 이 작품은 최초의 역사적 주제를 다루기도 하였지만 인간의 내적 심리적 문제를 다룬 오페라이기도 합니다.
로마 오페라에서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 사이에 확실한 음악적인 구분이 생겼습니다. 아리아의 선율은 좀 더 화려하면서 흥미롭고, 박자가 뚜렷해 가사보다는 음악이 더욱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독창자 한 사람의 아름다운 선율을 선호했지만, 두 사람의 독창자가 계속저음 위에서 부르는 '삼중주 짜임새'(trio texture)도 자주 나타나는 형식이었습니다. 레치타티보는 야코포 페리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작품들보다는 좀 더 말에 가깝게 되었고, 모든 음악적인 관심은 아리아에 집중되었습니다. 레치타티보에서는 선율이 단순해 반복음을 많이 가지고 있고, 리듬은 주로 가사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레치타티보에서의 음악은 주로 극 구성 중에 필요한 행위의 묘사나 대화에 주로 사용됩니다.
② 베네치아 오페라
바로크 시대 초기의 오페라는 그리스의 극을 재현하려는 지적 추구로 시도되었고, 주로 몇몇 후원자들의 특수한 행사에 맞춰 공연되었습니다. 이러한 오페라는 이탈리아 북동쪽 지역과 발칸반도의 서쪽 해상을 장악했던 베네치아 공화국(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697년 ~ 1797년)의 수도에서 상당히 다른 성격의 오페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오페라는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중산층의 관심 대상이 되었는데,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 유럽 최초의 공공 오페라 극장이 베네치아에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1637년). 또한 오페라는 대중을 위한 오락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700년 경까지 베네치아에서는 400여 편이 넘는 오페라가 17개의 극장에서 연주되었고, 축제 기간때에는 오페라 공연이 여러 극장에서 동시에 연주되기도 했습니다.
1650년 전후로 오페라의 대중화가 일어나면서 오페라의 흐름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바로크 시대 초기처럼 음악이 극이나 가사의 표현을 돕기 위한 봉사자가 아닌 주도자의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오페라의 대본은 남성 소프라노 가수인 '카스트라토'나 다른 높은 음역 가수의 아리아를 부각시키고, 중창과 기악은 무시되는 형태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가수의 아리아가 대중의 이목을 강하게 끌게 되면서 일어난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오페라 극장 공연들이 귀족의 후원이 아니라 입장권 판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관객과 청중의 입김이 강해진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베네치아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작곡가는 바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입니다. 그는 성 마르코 성당의 음악감독이 된(1613년) 이후에 《율리씨즈의 귀향》(Il Ritorno d' Ulisse in patria, 1640년)이나 《포페아의 대관식》(L' Incoronazione di Poppea, 1642년)과 같은 비중이 있는 오페라 작품들을 작곡했습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가 죽은 후에는 프란치스코 카발리(Francesco Cavalli, 1602년 ~ 1676년)와 안토니오 체스티(Antonio Ceti, 1623년 ~ 1669년)가 주도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들은 레치타티보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서정적 아리아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프란치스코 카발리의 아리아는 노래부르기가 쉬운 리듬의 부드러운 온음계적 선율로 되어있었는데, 이러한 기법은 19세기에 와서 꽃을 피운 벨칸토(belcanto, 아름다운 선율)의 기원으로도 여겨집니다. 베네치아 오페라는 베네치아를 방문했던 다른 지역의 귀족들이나 작곡가들에 의해 다른 지역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다른 지역을 여행하면서 공연하던 유랑 오페라단에 의해서도 이탈리아나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③ 나폴리 오페라
나폴리 오페라는 베네치아의 '페비아르모니치'(Febiarmonici, 아폴로의 음악인들)라는 유랑 오페라단이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Regno di Napoli, 1285년 ~ 1816년)의 수도인 나폴리에 전해주면서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오페라단이 나폴리에서 베네치아 오페라를 연주하고 1년이 지난 1653년에 프란체스코 프로벤잘레(Francesco Provenzale, 1626년 경 ~ 1704년)의 첫 나폴리 오페라 작품 《테세우스》(Theseus)가 연주되었습니다.
프란체스코 프로벤잘레가 시도했던 '다카포 아리아'(dacapo aria)는 곧 나폴리 오페라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다카포 아리아는 A-B-A의 3부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B 부분 후에 다카포(처음부터) 또는 D.C.라는 단어가 적혀있는데, 이 것은 첫 번째 부분을 반복하라는 의미입니다. 실제 악보에 생략된 반복 부분은 오페라 가수들에 의해 즉흥적으로 연주, 장식되었고, 이는 가수의 장식하는 기술이나 음악성 등을 테스트하는 시험대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폴리 오페라는 아름다운 선율에다가 음악적 관심을 집중시켜 극적인 전개를 진행하기보다는 우아함과 즉각적인 효과를 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페라의 대중화와 청중들의 음악적 성향에 좌우되기 시작한 오페라가 정착하면서부터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17세기 말, 나폴리 오페라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레치타티보가 등장했는데, 이 레치타티보들이 이후에 나타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표준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두 레치타티보 중 하나는 '레치타티보 쎄코'(recitativo secco)로 계속저음의 반주를 가지고, 다른 하나는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recitativo accompagnato)로 큰 관현악 앙상블로 반주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종류는 긴 대화, 독백들을 음악적인 요소로 방해받지 않고 가능한 빨리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두 번째 종류는 강렬한 극적 상황에 관현악이 종종 표현적인 동기를 가지고 반주를 하는 것입니다. 이후에는 레치타티보처럼 자유로운 리듬을 사용하지 않거나, 또는 아리아처럼 선율스럽지 않은 둘의 중간 형태인 '아리오조'(arioso)가 나폴리 오페라에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나폴리 오페라를 정상에 올려놓은 대표적인 작곡가는 알렛산드르 스카를라티(Alessandro Scarlatti, 1660년 ~ 1725년)입니다.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1684년에서 1702년까지 나폴리가 오페라의 중심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기간동안 나폴리에서 공연된 오페라 작품들의 절반 이상이 모두 그의 작품이었으며, 약 40여 개의 작품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알렛산드르 스카를라티는 이탈리아 서곡(sinfonia)의 정착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이탈리아의 서곡은 빠름-느림-빠름의 순서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세 개의 부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알렛산드르 스카를라티 오페라의 특징은 다카포 아리아와 서정적이면서 비르투오소적인 선율, 그리고 우아한 음향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④ 오페라 부파
17세기에는 영웅적인 요소와 희극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오페라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희극적인 에피소드를 가진 오페라들은 다소 심각한 분위기의 나폴리 오페라에서는 사라지게 되었고, 이러한 요소들은 별도로 독립하여 '인테르메초'(intermezzo)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점차 굳어져서 본격적으로 오페라의 막간에 끼워 넣는 희극적인 작품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는 나폴리에서 인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반적으로 두 명의 등장인물을 등장시키는 단순한 구성으로 되어있지만, 당시의 신화나 영웅들을 주제로 했던 심각한 오페라('오페라 세리아', opera seria)같이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나뉘어져 있고, 각 막은 2중창으로 끝이 납니다.
나폴리에서는 인테르메초와는 또 다른 형태의 희극 오페라인 '오페라 부파'(opera buffa)가 성행했고, 그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오페라부파는 6 ~ 10명의 배역에 레치타티보, 아리아, 중창 등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독립적인 공연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오페라 부파는 일반적으로 희극적 인물과 평범한 인물 사이에 일상적인 삶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산층 계급이 생겨남에 따라 대본에는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들이 가미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오페라 부파는 음악이 단순했기 때문에 주로 아마추어나 미숙한 배우들이 연주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저수준의 오락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지오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년 ~ 1736년)의 작품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 1732년)처럼 비중있게 다루어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자주 무대에서 연주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희극 오페라의 전통은 18세기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발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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