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부터는 새로운 음향을 추구했던 흐름 중 큰 분류로 나뉠 수 있는 아방가르드 음악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앞서 알아보았던 구체음악, 전자음악보다 좀 더 난해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점 감안해주시기 바라며,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악보, 예시도 많이 제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 아방가르드음악
'전위예술'이라 번역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Avantgarde, 본부대가 나가기 전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하는 전위부대를 지칭하는 군대용어)는 형식적이거나 일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예술을 의미하는 개념입니다. 아방가르드는 이미 20세기 전반에 전통과 단절되었던 음악양식인 무조음악과 12음기법에 내포된 '개혁의 연속된 진행'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전통과 역사성을 완전히 벗은 아방가르드 정신은 20세기 후반이 되면서 존 케이지의 음악세계와 일치되어 갔습니다. 당시 미국사회에서는 존 케이지의 음악세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는 먼저 존 케네디(John F. Kennedy, 1917년 ~ 1963년)의 인권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인권통합정책이 1960년대 미국 사회에 희망이 된 점,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공황을 완전히 탈피한 경제적 풍요로움은 많은 미국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1960년대 미국이 대외적으로 취하기 시작한 반공노선으로 인해 발발한 월남전은 1964년 버클리 대학을 시작으로 일어난 반전운동과 흑인인권운동의 싹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 저항, 그리고 변혁보다는 회피를 선호하는 히피들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미국 파워엘리트의 위선과 위계질서에 대한 공격을 담은 '반 문화운동'으로 인해 미국의 문화는 동요되었고, 이러한 반 문화운동은 팝아트(Pop-art), 조립예술(Art of Assemblage), 설치예술(Environmental Art), 해프닝(Happening) 등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들로 인해 존 케이지의 음악세계와 불가분의 관계가 형성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1) 케이지의 예술관과 그 영향
전위예술가로 좀 더 잘 알려져있는 존 케이지의 예술관은 '예술의 목적은 매일 매일의 일상적 삶과 예술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데 있다'라고 주장했던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예술관은 소음에 대한 관심, 전통적인 미학에 도전했던 화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년 ~ 1968년)으로부터 받은 영향, 그리고 1947년 이후 접하게 되었던 동양의 선불교(Zen Buddihism)와 주역에 대한 연구의 결과로 인해 구체화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존 케이지의 스승은 헨리 카웰과 아놀드 쇤베르크입니다. 그는 평소 존경했던 아놀드 쇤베르크에게 작곡가로서보다는 발명가로서 좀 더 인정을 받았지만, 바로 그 실험 정신을 통해 아방가르드의 대부로, 그리고 독일 플럭서스(Fluxus) 그룹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 "예술이란 색을 칠하거나 구성할 수도 있지만 단지 선택할 수도 있다"라는 궤변과 함께 '이미 만들어진(ready made)' 물질에 미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마르셀 뒤샹은 1941년부터 존 케이지와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르셀 뒤샹의 미학관에 영향을 받은 존 케이지는 매일 일어나는 일상에서 음악의 재료를 구함으로써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선택하였습니다. 하여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1919년 ~ 2009년)과 작업한 《우리들의 크레도》(Credo in Us, 1942년)에 사용한 얇은 깡통이나 전자버저, 톰톰, 피아노, 그리고 사진 등은 당시 존 케이지가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상의 소리를 가지고 콜라주를 하는 존 케이지의 작품관은 피아노 현에 고무나 나사, 종이 등을 삽입하는 '프리페어드(미리 조작된)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과 《4분 33초》(1951년)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변 환경 속에서 우연히 나오는 소리로 《4분 33초》를 구성하고자 했던 존 케이지의 창작 의도는 네오다다이즘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는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년 ~ 2008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 결과 캔버스에 흰색만 칠해 전시를 한 《하얀 그림들》이라는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① 팝아트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던 존 케이지의 미학과 가까운 팝아트는 대중적인 문화(매스 미디어, 상품광고, 만화, 마릴린 먼로나 프레슬리 같은 대중스타 등)를 예술 속으로 가지고 옴으로써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이분법적 구조를 무너뜨렸습니다. 《행복한 눈물》(Happy Tears, 1964년)이라는 작품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년 ~ 1997년)과 앤디 워홀(Andy Warhol, 1931년 ~ 1987년)에 의해 시작된 팝아트는 1960년대 후반 미니멀 아트로 연결되게 되었습니다. 미니멀 아트는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여 최소한의 조형 수단과 표현에 의한 그림, 조각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건축과 문학, 음악 분야로 확대되었습니다.
② 해프닝과 플럭서스
비연극적, 비음악적, 비미술적인 것들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행위를 가장 중요한 예술로 여기는 해프닝과 플럭서스는 존 케이지의 영향으로부터 발생된 것입니다. 해프닝은 1950년대 초반 무용가 메세 커닝햄과 음악가 존 케이지, 그리고 화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해프닝은 존 케이지가 1952년 블랙마운틴대학에서 벌였던 이벤트에서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나왔던 존 케이지의
해프닝에 영향을 받은 백남준(Nam June Paik, 1932년 ~ 2006년)이 1960년대 전후에 출품했던 작품들이 이 해프닝에 속합니다. 백남준은 《피아노를 위한 에튀드》(Etude for Pianoforte, 1960년)라는 작품에서 '음향적 작업'을 넘어 2대의 피아노를 파괴하고, 존 케이지의 와이셔츠를 찢으며, 넥타이를 자르고 머리를 감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강아지를 끌고 산책하듯이 바이올린을 끌고 다니는 《길에 끌리는 바이올린》(1961년)과 《음악전람회-전자텔레비전》(Exhibition for Music: Electronic Television, 1963년)을 통해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영역의 작품세계를 열게 되었습니다. 첼리스트인 샬로트 무어만(Charlotte Moorman, 1933년 ~ 1991년)이 3대의 텔레비전과 2개의 기타줄로 만든 미술작품을 끌어 안고 첼로 연주를 흉내내는 《TV첼로》(1971년)는 종종 볼 수 있는 대표작입니다.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이 음악사보다 미술사에서 더 많이 언급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예술의 경계를 허물기, 즉 탈장르화를 한 대표적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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