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18세기의 대가들 1/7(2022.07.27)-시대적 배경

작은대학교 2022. 7. 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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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바로크 시대의 성악음악과 기악음악 양식들이 어떤 것이 있고,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음악 양식들을 발전시켜왔던 바로크 시대의 대가 4명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 챕터를 마지막으로 바로크 시대를 마무리짓고자 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18세기에 활동했던 대가들은 어떤 음악적인 환경에서 활동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 시대적인 배경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크 시대가 끝나면 고전시대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넘어가기 전에 살짝 쉬어가는 시간을 갖을 예정이니 이 점 또한 참고해주시기바랍니다. 감사합니다)


ⅩⅢ. 18세기 전반의 대가들

 

앞에서 바로크 시대의 일반적인 상황과 바로크 시대의 성악음악, 그리고 기악음악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자세히는 바로크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음악 장르나, 이전 시대에 사용되고 발전된, 그리고 확장된 다양한 음악장르도 함께 알아보았습니다. 이에 이번에는 18세기에 활동하면서 후기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집대성했던 4명의 작곡가의 생애와 작품들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이 4명의 작곡가는 이전까지 서양예술음악의 흐름을 주도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국, 독일을 대표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대표작품에 대한 논의는 그들이 각자의 환경에서 작곡가로 직면했던 당시의 사회 시대상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합니다.

 

1. 18세기 전반의 음악환경

 

출처 : 바로크 음악 - 나무위키 (namu.wiki)/앙부레 부이스(Andre Bouys)의 《음악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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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가 된 서유럽은 프랑스와 영국처럼 절대군주를 중심으로 거대국가를 유지했던 나라도 있었지만, 이탈리아나 독일처럼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수많은 독립된 정치적 단위들이 함께 구성된 나라들도 많았습니다. 절대군주가 이끌던 국가들 뿐만 아니라, 작은 공국이나 강력한 도시국가들까지도 모두 예술에 후원을 하면서 자신의 세력과 부를 과시하려고 하는 모습이 두드러졌으며, 이러한 것은 음악가들의 절대적인 후원체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활동했던 음악가들은 어느 한 지역에서 지속적인 후원을 받으며 활동했다기보다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국제적인 활동을 주로 하였습니다. 왕이나 귀족, 교회들은 명망 있는 음악가들을 고용하기 위해 경쟁을 했고, 이런 환경에서 당연히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으로 승부를 봐야만 했습니다. 경쟁력 있는 작곡가들은 더 나은 보수를 받기 위해 자리를 옮기기도 했고, 이렇게 지역을 옮기면서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양식과 기법을 경험하고 작품에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출신지역의 음악양식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양식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국제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작품들을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은 일반적으로 과거나 미래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현재에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이러한 점은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지만, 바로크 시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그 사회의 음악환경은 기존에 사용했던 곡을 다시 연주하기보다는 매번 새로운 곡을 작곡해야만 했다는 점입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교회를 위해 새로운 칸타타를 끊임없이 제공해야만 했고, 조지 프리데릭 헨델은 런던의 청중들을 위해 매년 한 곡 이상의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비발디 또한 베네치아에서 자신이 일했던 피에타 오스페달레의 음악 발표회나 도시의 축제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오라토리오와 협주곡들을 써야만 했습니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이런 필요성은 18세기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엄청난 스피드로 새로운 작품을 작곡할 것을 요구했고, 그 결과 그들은 엄청난 수의 작품들을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때그때 달라지는 상황에 따라서 작곡을 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대부분의 음악들은 어떠한 주문에 따라서 구체적인 목적에 맞게 작곡되었습니다. 이런 주문은 주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궁정이나 교회, 오페라 극장, 시의회 등에서 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 집단들은 작곡가들에게 일종의 후원체계를 제공함에 따라 음악 생산의 원천을 만들게 되었지만, 이런 후원을 받은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체계를 거쳐 고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작곡가의 작품량이나 종류는 후원자나 고용주가 정하는 바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작곡가들은 이런 후원체계 속에서 자신의 직위에 따라서 활동 공간의 제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자기 자신을 "상사를 만족시키고 동료들을 즐겁게 하고 교화시키고 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직업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조지 프리데릭 헨델의 관현악 모음곡 중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라는 작품은, 고용주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외출했던 것에 대한 용서를 비는 뜻에서 작곡된 작품이라는 일화도 있습니다. 쟝 필립 라모는 50세가 되어서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는데, 이러한 행운도 프랑스의 대 부호 라 푸플리니에르(Le Riche de la Poupliniere, 1693년 ~ 1762년)의 후원이 시작되서야 가능했습니다.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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