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19세기의 시대적 배경 1/4(2022.10.26)

작은대학교 2022. 10. 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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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벌써 19세기의 낭만주의를 알아보는 날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요즘 자주 들리는 클래식 중에서 낭만주의의 음악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있어 어렵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른 특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의 분위기를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ⅩⅧ. 19세기의 시대적 배경

 

19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연주회장이나 오페라 극장, 영화 또는 방송 등 다양한 형태로 접할 수 있어 우리들과 아주 친숙합니다. 이 시기는 수 많은 유명 작곡가들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음악도 엄청 풍부하고 다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다양한 음악 장르가 공존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19세기의 음악을 일반화하는 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흔히 낭만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수많은 작곡가들이 거의 한 세기동안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작곡했는데, 그것을 단순하게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19세기의 급변하는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보면, 이 시기의 음악이 문학과 미술 등 다른 예술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낭만주의 외에 다양한 사조들의 영향을 받은 복합적인 산물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각 나라가 가지고 있는 음악의 고유한 특색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19세기의 작곡가들은 고전주의의 음악 형식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낭만주의와 관련이 있는 강렬한 감정의 표현 또한 이미 하이든이나 베토벤의 작품을 통해서 시도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 음악과 19세기의 낭만주의 음악에는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낭만주의의 음악은 음색이나 다이나믹, 음역이 고전시대보다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화성 어법은 색채가 풍부한 화음과 불안정한 화음을 사용해서 더욱 다양하게 변화하였습니다. 고전주의 형식에서 강조되어왔던 균형은 점점 약화되었고, 해결이 지연된 채 긴장을 끝까지 끌고 가는 극적인 형식을 가진 원리가 생겨났습니다.

 

또한 모든 생물은 내부의 각 부분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유기체론(organicism)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이 예술에 적용되었습니다. 19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이 유기체론적 사고가 제기되면서 예술가들도 이에 동조하게 되었고, 작품이라는 소우주 안에서 생명력이 있는 완전한 통일체를 구현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모든 사물 안에서 통일성을 찾고자 하는 이 이론은 각기 분리되어 있는 부분이나 소품들을 통일성 있게 묶어내어 커다란 하나의 작품으로 구현해내는 19세기의 음악 구조에도 반영되었습니다.

 

1. 19세기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

 

1) 새로운 유럽의 탄생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사회적인 평등을 쟁취하려는 농민과 노동자가 시민이라는 계급으로 격상하는 계기는 마련했지만, 정치적인 이념을 달리했던 파벌들의 대치와 공포정치로 프랑스를 이상주의 사회로 만들고자 했던 희망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혁명 이듬해인 1790년, 정권을 잡게 된 나폴레옹은 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1814년의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러시아에게 패하면서 프랑스 국민들은 공허와 상실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에도 유럽은 안정된 시기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영국은 이미 산업혁명으로 인해 거대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지만,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은 다시 군주제로 되돌아가고 있던 실정이었습니다. 하여 불가피하게 혁명은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30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7월 혁명)은 1848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많은 유럽인들이 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는 이런 환경 속에서의 저항, 슬픔, 사회의 위기적인 상황, 그리고 개개인들이 받았던 충격들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즉 낭만주의 시대는 그 시대의 혁명정신을 반영하긴 했지만, 반대로 혁명이 가져왔던 절망감과 상실감의 결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혁명의 실패를 보상받고 싶어 했었고, 나폴레옹이 이뤄내지 못했던 제국의 유토피아도 꿈꾸었습니다. 따라서 낭만주의자들은 급진적이면서 자유롭고, 때로는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프랑스에게 침략을 당했던 이탈리아와 독일어권의 국가들은 여전히 소수의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지만, 각국의 국민들에게는 동일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1870년대 프로이센(현재 독일의 동북부와 러시아 서부의 일부 지역),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되고 지배당했던 폴란드, 헝가리, 보헤미아 등의 동유럽 지역에서는 민족적인 합병을 통한 독립을 원했고,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에서도 강한 민족의식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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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세기 사회와 음악

 

유럽의 정치적 상황과 산업화로 인해 경제적인 질서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이로 인해 음악가의 위상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잦은 전쟁으로 인해 귀족들의 부는 점점 상실되어갔고, 크고 작은 공국들이 해체됨에 따라 음악가를 후원하는 궁정들이 사라져간 것입니다.

 

18세기까지 음악가는 귀족이나 왕의 후원을 받으며 궁정음악가로 지내는 것을 가장 큰 영예라고 여겼지만, 19세기가 되면 음악가는 경제적인 부담을 스스로 짊어지고는 있지만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는 것을 더 선호하였습니다.

 

산업화로 부를 축척할 수 있었던 중산층들은 그들의 힘과 특권을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연주회나 연주단체 후원제도를 확립했고, 가까운 친지나 귀족들과 함께 유망한 음악가를 집에 초청해 샬롱음악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특히 고등교육을 받았던 법률가, 의사, 교육자 등과 같은 중산 부유층들은 음악을 통해 자신들이 귀족계급과 동등한 교양인으로서 행세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 예로 음악의 낭만주의를 처음으로 환기시켰던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1776년 ~ 1822년)은 법률가이자 소설가였던 동시에 음악비평과 작곡을 했고, 로버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년 ~ 1856년)은 법학을 공부했지만 음악비평과 작곡을 했습니다. 헥터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년 ~ 1869년)는 의학을 공부했지만 작곡과 지휘, 비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들은 모두 전문직을 공부했음에도 부룩하고 음악의 길을 걷게 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은 산업화로 인해 인구가 도시에 점점 몰려들게 되었고, 이렇게 발달하게 된 도시에는 오페라극장과 연주회장, 음악교육기관, 합창단 등이 설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세기 중반에는 여러 도시에서 공공연주회가 성행하기도 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악기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보다 넓은 부류의 음악소비자들이 확보되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중산층 가정에는 피아노와 같은 다양한 악기들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여가시간을 통해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실내악을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 아마추어들을 위한 가벼운 음악들이 작곡, 출판되어 음악계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반면 건반악기와 관악기의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악기들은 정교해졌고, 튜바와 색소폰, 첼레스타 등의 새로운 악기들도 등장하였습니다. 또한 오페라가 성행하여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여전히 즐길 수 있는 오락으로서 오페라가 자리잡았습니다. 이때의 오페라는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이나 대중들에게 모두 인기가 있던 장르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19세기는 예술적인 깊이가 탁월했지만 대중들에게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채 전문가들의 살롱에서 연주되었던 음악, 공공음악회용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음악, 아마추어를 위한 가볍고 대중적인 음악들이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Mozaik 디지털 교육과 공부 (mozaweb.hu)/모리츠 폰 슈빈트의 〈슈베르티아덴〉, 슈베르트와 그 친구들의 사적 모임을 그린 그림, 요한 미하엘 포글(Johann Michael Vogl)이 노래하고 슈베르트가 피아노 치는 것을 친구들이 경청하고 있는 그림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에 절대왕정이 복구되가는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시민들은 가정에 안주해 가족과 친지들을 초대해 작은 살롱음악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술에 일가견이 있는 부르주아들이나 예술가를 중심으로 모였던 살롱음악회 또한 열렸습니다. 19세기의 대표적인 살롱음악회 중에는 위의 그림인 〈슈베르티아덴〉이 있습니다.

 

소시민들의 여흥을 위한 가정음악은 종종 '비더마이어'(Biedermeir)라는 용어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이 용어는 '속물'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소시민적인 고루하고 속물적인 교육열, 저급한 감상주의를 꼬집기 위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음악적 비더마이어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음악이 다수의 취향에 부합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평가 절하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음악적 비더마이어는 중산층의 가정음악회를 선두로 음악기관인 합창 단체, 오라토리오 협회, 음악축제 등 다양한 사회적 제도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 음악은 그 기능상 음악의 독창성이나 천재성보다는 오락성이나 실용성에 치우쳐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비더마이어 음악이 다소 부정적 의미로 음악사에 등장하긴 했지만, 실상 당대 음악의 교육이나 보급에 있어 끼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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