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19세기의 시대적 배경 3/4(2022.10.31)

작은대학교 2022. 10. 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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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낭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다루었는데, 오늘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들을 다루어볼까 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2)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근거한다는 경험주의적인 사고는 자연스럽게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이끌어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운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점점 수그러진 반면, 경험주의와 병행했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모든 예술 분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문학에서는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카르멘』(Carmen, 1845년)을 쓴 프랑스의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erimee, 1803년 ~ 1870년),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 1839년)를 영국의 찰스 디킨스(Charles Dickins, 1812년 ~ 1870년), 『톰 소여의 모험』(Tom Sawyer, 1876년)을 쓴 미국의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년 ~ 1910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 계급의 일상생활을 적나라하게 그린 소설로 때때로 비참하고 폭력적인 사실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연주의는 도시인들의 각박한 생활에 지친 피로를 자연에의 동경으로 해소하듯이 낭만주의와 연관되어 나타납니다.

출처 : 노동자의 삶그린 오노르 도미에'삼등열차' - 울산신문 (ulsanpress.net)

낭만주의의 예술은 위의 그림과 같이 대상의 아름다움과 기쁨만이 아닌 고통과 슬픔, 두려움까지도 포용합니다. 음악에 나타나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1853년), 자코모 푸치니의 《라 보엠》(La boheme, 1896년), 조르주 비제의 《카르멘》(Carmen, 1875년),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 1869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 트라비아타》에서는 평판 나쁜 여자를, 《카르멘》에서는 집시 출신 공장여공을, 《보리스 고두노프》에서는 후계자를 살해한 왕의 죄책감을 사회적인 또는 심리적인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3) 역사주의와 민족주의

 

19세기 예술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로 역사주의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변화된 시각과 이전 세기의 업적들에 대한 철저한 재고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경시하던 중세 시대의 문명이 재평가되었고,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년 ~ 1321년),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 ~ 1616년),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년 ~ 1616년) 등의 문학이 새로운 조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역사주의는 19세기 음악에서 유럽 각국의 선조 작곡가들을 발굴하는 팔레스트리나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부활 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그의 생애동안 한 지방의 오르가니스트나 성가대장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고, 그의 작품들도 생전에는 아주 적은 수의 작품들만 출판되었습니다. 그의 《평균율곡집》(Das Wohltemperierte Clavier) 필사본도 18세기 말에나 유통되어 베토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800년에서야 이 작품이 출판되었으며, 1802년에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 1749년 ~ 1818년)이 전기를 출간하면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재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 수난곡》(Matthaus-Passion)의 첫 공연 100주년을 기념해 1829년에 이 곡을 연주하였습니다. 그 당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부활 운동은 독일 음악계의 중심 운동이었는데, 이러한 역사주의적 운동은 민족주의적인 것과도 깊이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스승이면서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 1832년)의 음악 조언자이기도 했었던 칼 프리드리히 첼터(Carl Fruedruch Zelter, 1758년 ~ 1832년)는 이러한 현상을 문학세계의 셰익스피어 부활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옛 양식의 재발견은 19세기 음악계의 변화를 유도했는데, 이 당시의 작곡가들에게는 동시대의 작곡가들뿐만 아니라 선배 작곡가들까지도 그들의 경쟁상대였습니다. 프란츠 슈베르트,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는 현악사중주, 교향곡과 같은 자신들의 작품이 당시에 자주 연주되었던 베토벤의 교향곡과 비교되어 의기소침해졌다고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19세기에 작곡되었던 어떤 오르간 음악이나 오라토리오도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작품이나 게오르크 프레드리히 헨델의 작품과 연관시키지 않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발언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요제프 단하우저(Josef Danhauser, 1805년 ~ 1845년)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당대 최고의 진보적인 모임이 이루어졌던 파리의 살롱에서도 과거 고전주의의 거장이었던 베토벤을 경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출처 : <음악과 미술> 요제프 단하우저 - 피아노 치는 리스트 - 음악/詩/그림/휴식 - 현녀의즐겨찾기 (daum.net)/요제프 단하우저의 〈피아노 앞의 리스트〉(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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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성가의 뿌리를 찾는 성 세실리아(St. Cecilia) 운동 역시 음악의 보호자로 알려진 성녀 세실리아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과거의 음악에 대한 재고와 동경으로부터 시작된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가톨릭 음악을 재현하는 것으로 그레고리오 성가와 16세기 팔레스트리나의 다성음악 양식을 복원한 것입니다. 1828년에는 팔레스트리나의 전기가 발간되었고, 프랑스 가톨릭 음악의 영향을 받은 프란츠 리스트는 1834년 「교회음악의 미래」라는 글을 발표하고, 교회음악과 대중이 더욱 가까워질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2개의 오라토리오 작품과 4개의 미사곡, 그리고 합창과 오르간을 위한 《십자가의 길》, 《레퀴엠》 등 다수의 종교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년 ~ 1896년)는 그의 모테트나 미사곡에 르네상스 시대의 아카펠라 양식을 재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프랑스의 헥터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 1803년 ~ 1869년),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1845년 ~ 1924년) 등이 프란츠 리스트의 뒤를 이어 가톨릭 음악 작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 동일한 언어와 문화를 중심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자유와 통합을 위한 긴 투쟁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 무렵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던 독일, 러시아, 영국, 아일랜드 등의 민요모음 작업도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게 되었습니다. 민족주의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소재는 민요선율과 민속춤이었고, 이런 민족의식에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들어가면서 각 나라의 고유한 민족주의 음악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헥터 베를리오즈, 프란츠 리스트, 프리데릭 프랑수와 쇼팽, 리하르트 바그너, 주세페 베르디, 요하네스 브람스도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 작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의 작품들이 애국심과 정치적인 성향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Ungarische Rapsodie), 프리데릭 프랑수와 쇼팽의 마주르카나 폴로네즈 같은 춤곡은 애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신비감을 그려낸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의 민족주의 음악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보다 비서구 나라들의 이질적인 음악에서 오는 이국적이면서도 지방색 강한 성격이었습니다. 이러한 음악으로는 지금까지 서양음악사를 이끌어 왔던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가 아닌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반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동유럽, 영국, 미국의 음악을 말하며, 이 지역들의 음악들은 전형적이면서 균형잡힌 서유럽의 음악과는 아주 다르며, 흥미진진하고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4)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

 

절대음악은 음악 외적인 요소가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기악음악을 의미합니다. 절대음악 미학을 따르는 음악의 장르는 고전시대의 교향곡과 현악사중주, 소나타 등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음악은 절대음악과 마찬가지로 기악음악이지만 여기에는 시와 소설, 신화, 그림 등을 소재로 삼아 작곡한 음악입니다. 19세기의 프로그램음악 작곡가들은 말이나 가사로 표현할 수 없는 문학적인 주제를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표제나 프로그램은 작곡을 위한 어떠한 소재일 뿐 그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곡의 제목이나 작품 해설에 표현하고자하는 것을 밝히고, 그것을 선율과 화성, 리듬, 음색 등의 요소에 의존해 음악으로 그려냈습니다.

 

19세기 이전의 프로그램음악들은 전쟁터나 시장의 떠들썩한 현장 또는 새소리, 물소리 등과 같은 자연의 소리들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묘사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기악부분들이 그런 예입니다. 그러나 19세기 프로그램음악의 목적은 묘사라기보다는 표현이 목적입니다. 이런 종류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위기와 정서,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원조로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교향곡은 전원의 풍경을 음악적으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베토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의 프로그램음악은 대부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된 것들입니다. 로베르트 슈만의 《숲속의 정경》(Waldszenen, 1848년 ~ 1849년), 모데스트 무소로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1874년)이 피아노를 위한 프로그램음악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프로그램음악의 진수는 무엇보다 다양한 음색과 표현이 가능한 오케스트라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프로그램음악의 유형에는 프로그램 교향곡(program symphony), 교향시(symphonic poem), 연주회용 서곡(concert overture), 부수음악(incidental music) 등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음악의 예로 펠릭스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1826년)은 셰익스피어의 연극 공연을 위한 단악장의 연주회용 서곡이며, 이후에 이 연극 공연을 위한 부수음악으로 완성되기도 했습니다. 헥터 베를리오즈의 《이탈리아의 해롤드》(Harold en Italie, 1834년)는 영국의 시인인 로드 바이런(Lord Byron, 1788년 ~ 1824년)의 시 『어린 해롤드의 순례』(Child Harold's Pilgrimage)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며, 시의 내용을 에피소드적이면서 성격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음악비평가로 활동했던 에두아르트 한슬릭(Eduard Hanslick, 1825년 ~ 1904년)은 "음악의 내용은 음으로 울리며 움직이는 형식들"이라고 하며 음악에 음악 외적인 요소가 개입되어선 안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작곡가로 절대음악을 고수했던 요하네스 브람스를 꼽았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 안톤 브루크너 등은 절대음악의 교향곡 전통을 이어나간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19세기에는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이 공존하였습니다.

 

19세기의 프로그램음악은 소나타형식, 론도형식 등의 절대음악과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음악과 구분할 때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학적, 회화적인 연관성은 단지 음악의 이해를 위한 프로그램으로만 작용했던 것이 아니라 음악작품 구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때문에 각각의 작품은 그 내용에 따라 고유한 성격과 형식을 만들어냈습니다.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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