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19세기 말의 음악적 양상 4/9(2023.01.11)

작은대학교 2023. 1. 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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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보헤미아와 스칸디나반도 출신의 작곡가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럼 오늘은 영국과 영국의 작곡가들을 알아보고, 미국의 음악적 양상을 알아보고 다음 시간에 미국의 작곡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4) 영국

 

스칸디나비아와 마찬가지로 영국도 19세기까지 독일음악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영국에서는 바로크 시기의 헨리 퍼셀 이후에 고전시대와 낭만시대까지는 특별하게 영국의 작곡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배출되지 못했었스빈다. 하지만 19세기 말이 되어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년 ~ 1934년), 보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년 ~ 1958년), 구스타프 홀스트(Gustav Holst, 1874년 ~ 1934년)와 같은 민족주의 작곡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① 에드워드 엘가

출처 : 에드워드 엘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에드워드 엘가

 

에드워드 엘가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처음 음악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지휘자로서 워체스터 교향악단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1890년대부터는 작곡자로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리하르트 바그너와 요하네스 브람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후기 낭만주의풍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작곡가에 비해 비교적 민요나 다른 민속적 재료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을 영국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넓은 도약과 급격한 하행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전형적인 선율 윤곽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선율적 특징은 《수수께끼 변주곡》(Enigma Variation, 1899년)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수수께끼 변주곡》 중 <니믈롯>(Nimrod)

《수수께끼 변주곡》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변주곡이면서 로베르트 슈만의 《카니발》처럼 변주곡 하나하나에 자신의 특이한 영국 친구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변주는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es, 1901년)처럼 장엄하고 위엄있는 행진곡풍의 곡입니다.

 

② 보언 윌리엄스

출처 : 레이프 본 윌리엄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보언 윌리엄스

 

보언 윌리엄스는 베를린에서는 막스 브루흐(Max Bruch)에게, 파리에서는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년 ~ 1937년)에게 음악을 배웠습니다. 하여 그의 음악은 후기 낭만적이면서도 인상주의적이기도 합니다. 그는 <영국 민속춤과 민요 협회>(English Folk Dance and Song Society)의 회장직을 역임하면서 민속적 자료를 수집했던 민족주의자이며, 에드워드 엘가와는 다르게 그의 작품에는 16세기 영국의 다성음악, 찬송가, 민요 등의 민속적인 소재가 자주 등장합니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동시대의 음악들과는 다르게 복잡하지 않고 접근하기 쉬운 대중적 경향에 치우쳐져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민요를 수집하여 거기에 화음을 붙였고, 민속선율을 바탕으로 대규모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국 성가집》(The English Hymnal, 1904년 ~ 1906년)을 만들기도 했는데, 여기에서는 민요와 함께 자신의 찬미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푸른 옷소매 선율에 의한 환상곡》(Fantasia on Greensleeves, 1934년)은 푸른 옷 소매 옷을 입은 바람기 있는 여자를 소재로 한 16세기말 영국 민요선율을 빌려온 것인데, 원래는 오페라 《사랑에 빠진 존 경》(Sir John in Love, 1928년)의 간주곡이었지만 1934년부터는 독립적인 작품으로 연주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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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국

 

초기의 미국은 외국으로부터 이주해 온 이민자들로 인해 당연히 다양한 외국 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840년대 미국은 고유한 대중음악과 종교음악을 갖게 되었지만, 고전음악은 아직 이탈리아 성악가, 독일 연주가, 프랑스 지휘자 등 유럽의 음악계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오케스트라가 유럽의 고전음악을 답습하는 동안, 밴드 음악은 콘서트나 지역 공동체 등 어디에서든지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선율연주가 자유로워진 밸브와 피스톤, 키가 달린 금관악기가 밴드에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1860년대 남북전쟁을 겪은 미국은 황폐한 상황에서 대중음악적 요소를 혼합한 밴드 음악이 사람들에게 쉽게 동화될 수 있었고, 그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북전쟁을 하는 동안 양 진영 모두 부대 밴드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 밴드들은 군대행진과 퍼레이드에 사용되어 밴드 음악은 이전에도 사람들에게는 이미 친숙해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밴드는 연주회장 뿐만 아니라 실내, 야외, 결혼식, 장례식, 정치 집회 등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환영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밴드들이 결성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적인 음악이 태동하는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소는 바로 뉴올리언스였습니다. 17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 전반까지 뉴올리언스는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유일하게 노예해방 이전의 노예들이 공공장소에 함께 모일 수 있도록 허락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유럽의 전통에 아프리카의 전통이 함께 어우러졌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의 거주자들은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음악과 춤을 즐기는 축제 전통을 이어나가면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음악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다양한 양식이 아무런 경계 없이 혼합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여 미뉴에트와 콰트릴(quadrlle, 4인무) 등 유럽의 춤곡이 아프리카의 부두(voodoo)교 제례음악과 공존하고, 노동요, 길거리 상인의 외침소리들이 음악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이 때 유행한 케이크워크(cakewalk)는 쌍을 이루어 우아하게 행렬하며 추는 춤으로 이긴 팀이 케이크를 상으로 받는다는 데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습니다. 케이크워크는 밴조나 피들의 당김음형 특성을 가진 선율에 맞추어 추는 춤이었으며, 19세기 후반부터 크게 유행하다가 1890년경이 되어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케이크워크의 음형적, 리듬적 특징들은 이후에 피아노 음악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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