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네덜란드 작곡가들3/3(2022.06.17)-동시대, 이후의 작곡가들

작은대학교 2022. 6. 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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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네덜란드 출신인 작곡가들을 알아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하네스 오케겜, 야콥 오브레흐트, 죠스켕 데 프레 이후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을 알아보면서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3. 죠스켕 데 프레의 동시대, 이후의 작곡가들

 

서양음악사상 1500년대를 전후로 수많은 정상급 작곡가가 배출된 시기도 그렇게 많다고 볼 수 없을겁니다. 16세기 음악이 죠스켕 데 프레의 음악으로 대표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 함께 활동하던 작곡가들 중에서도 죠스켕 데 프레에 견줄만한 작품들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하인리히 이삭(Heinrich Isaac, 1450년, 1455년 경 ~ 1517년)과 피에르 드 라 뤼(Pierre de La Rue, 1452년 경 ~ 1518년), 그리고 쟝 무통(Jean Mouton, 1452년 경 ~ 1522년) 등이 있습니다.

 

반면 죠스켕 데 프레가 사망한 이후부터 활동했던 작곡가들은 장소와는 상관없이 죠스켕 데 프레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이 발전시켜왔던 기법들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기법들과 장르도 개발하였습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세 명의 작곡가는 네덜란드 출신인 야콥 클레멘스(Jacob Clemenes, 1510년, 1515년 경 ~ 1555년, 1556년), 니콜라 공베르(Nicolas Gombert, 1495년 경 ~ 1560년 경), 그리고 아드리안 빌라르트(1480, 1490년 ~ 1562년)입니다.

 

1) 하인리히 이삭(Heinrich Isaac, 1450년, 1455년 경 ~ 1517년)

 

출처 : 15화 플란다스의 음악가들 1 (brunch.co.kr)/하인리히 이삭

 

이 시대에 활동했던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네덜란드 지방에서 출생했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하인리히 이삭은 피렌체에서 메디치가(家)의 로렌초(Lorenzo de' Medici)의 궁정에서 일하면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쌓았습니다. 로렌초가 사망했던 1492년 이후 하인리히 이삭은 피렌체를 떠나 빈(Wien)의 막시밀리아누스 1세(MaximillianusⅠ ) 궁정에서 작곡가로 일하면서 자유롭게 여행도 다녔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의 양식을 다양하게 수용할 수 있었던 그는 그 시대의 다른 작곡가들보다 비교적 국제적이고 다양한 작품들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이삭의 샹송과 모테트, 그리고 미사곡들은 4개의 동등한 성부로 구성되어 있는 전통적인 네덜란드의 기법으로 작곡되었고, 그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에 작곡했던 프로톨라들은 이탈리아풍으로 상성부에 주선율을 사용하는 칸틸레나 양식입니다. 그는 독일적인 리트(Lied)도 작곡했으며,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어로 된 가사를 사용한 샹송들을 작곡했으며, 때때로 가사가 없이 악기로만 연주되는 샹송풍의 짧은 곡들도 작곡하였습니다. 하인리히 이삭은 작품의 양이나 질에 있어 죠스켕 데 프레의 작품들과 비견되는 곡들을 남겼는데, 그 당시에 종종 죠스켕 데 프레보다 더 높이 평가되는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인리히 이삭은 네덜란드의 양식을 독일에 전파시켰던 첫 작곡가라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 큰 공헌을 한 작곡가이기도 했고, 독일의 유명한 리트 작곡가인 루드비히 젠플(Ludwig Senfl, 1486년 경 ~ 1543년)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선생이기도 했습니다.

 

2) 피에르 드 라 뤼(Pierre de La Rue, 1452년 경 ~ 1518년)

 

출처 : Pierre de la Rue - Wikipedia/피에르 드 라 뤼

 

피에르 드 라 뤼는 1482년부터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에서 성악가로 활동했던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현존하고 있는 피에르 드 라 뤼의 작품들은 모두 그의 생애 말 20년 동안 작곡된 것입니다. 그는 주로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활동했으며, 카논과 모방기법을 능숙하게 활용하였고, 미사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여러가지 기법들을 구사하였습니다. 샹송들 또한 주션율이 있는 상성부에만 가사를 사용하는 정형시 형식으로 작곡된 샹송과, 서로 모방하는 동등한 성부를 가진 샹송들이 있습니다. 피에르 드 라 뤼와 함께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은 그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론가들 또한 그들의 논문에 그의 작품들을 예시로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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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쟝 무통(Jean Mouton, 1452년 경 ~ 1522년)

 

출처 : Jean Mouton and his 'Nesciens Mater Virgo virum' — Luminous Voices: Calgary’s Professional Chamber Choir/쟝 무통

쟝 무통은 브리타니의 앤(Anne of Brittany), 루이 12세(Louis ⅩⅡ), 그리고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Francois Ⅰ)의 궁정에서 일했던 작곡가입니다. 그는 15개의 미사와 약 20여 개의 샹송, 100여개가 넘는 모테트를 작곡하였습니다. 쟝 무통은 처음으로 완전한 패러디미사를 작곡한 작곡가 중 한사람으로 그의 미사들은 정선율 미사에서 패러디미사와 변용미사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그는 작곡가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지만, 아드리안 빌라르트의 선생으로서 더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4) 야콥 클레멘스(Jacob Clemenes, 1510년, 1515년 경 ~ 1555년, 1556년)

 

야콥 클레멘스는 네덜란드의 작곡가였던 야콥 파파(Jacob Papa)와 구별하기 위해 클레멘스 논 파파(Clemens non Papa)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다산적인 작곡가였는데, 14개의 미사와 230개의 모테트, 160개에 달하는 살터 노래(Souterliedekens)와 기도를 위한 노래(Lofzangen), 80개 가량의 샹송, 8개의 네덜란드 노래 등을 썼습니다. 야콥 클레멘스의 다성음악은 대체로 실러블적으로 작곡되었으며, 모방이 지속적으로 사용됩니다. 각 성부들은 음표 대 음표로 진행되지만 간혹 끝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 음에 멜리스마가 첨가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5) 니콜라 공베르(Nicolas Gombert, 1495년 경 ~ 1560년 경)

 

니콜라 공베르는 죠스켕 데 프레의 제자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죠스켕 데 프레의 죽음을 애도하여 그가 특히 좋아했던 성가 《그들에게 둘러싸여》(Circumdederunt me)를 사용하여 《음악의 재우스 신》(Musae Jovis)이라는 모테트를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니콜라 공베르의 작품으로는 11개의 미사와 1개의 마그니피카트, 160여개의 모테트, 70개가 넘는 샹송들이 남아있습니다.

 

그의 모테트에서는 1520년부터 1550년까지의 프랑코-플랑드르의 양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곡들은 각 성부가 동등하게 중요한 4~6성부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5성부로 작곡된 모테트가 대부분이고, 종지에서는 바수스 성부가 화성적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모방기점기법이 곡 전반에 사용되는데, 각 악구의 시작과 종지가 서로 겹치면서 계속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샹송들 또한 비슷한 짜임새로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모테트보다는 좀 더 생기있고 실러블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6)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aert, 1490년 경 ~ 1562년)

 

 

파리에서 법학 공부를 하고 있었던 아드리안 빌라르트는 어느 날부터 음악을 전공하기로 결심을 한 후에, 당시 왕실 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쟝 무통의 제자가 됩니다. 아드리안 빌라르트는 로마와페라라, 밀라노 등에서 음악 활동을 한 후에 1527년에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San Marco)성당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작곡가로 베네치아에 평생 직장을 얻은 선봉자 중의 한 사람이고,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일하였습니다. 아드리안 빌라르트의 지도 아래 성 마르코 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에 아드리안 빌라르트를 중심으로 '베네치아 악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다성음악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 그는 로레(Cipriano de Rore),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i), 그리고 차를리노(Gioseffo Zarlino) 등 훌륭한 작곡가들을 배출하여 16세기에 가장 중요한 작곡가 겸 선생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아드리안 빌라르트는 죠스켕 데 프레와 쟝 무통 등의 프랑스 궁정 음악 전통을 대표하고 있는 동시에, 16세기 후반 음악의 새로운 경향을 개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미사와 모테트, 마그니피카트, 찬미가, 시편 노래, 샹송, 마드리갈, 리체르카레 등 여러 장르의 곡을 작곡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170여 개의 모테트들이 그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단어나 구, 문장들이 쉼표로 중단되지 않도록 구상하였으며, 선율들이 가사의 억양을 살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사의 액센트, 문체, 문장구조에 따라서 선율의 악구가 결정됩니다. 또한 그는 가사의 각 음절을 정확하게 해당 음표 밑에 놓을 것을 출판사에 요구했던 첫 작곡가입니다. 그의 제자인 차를리노가 이후에 가사를 붙이는 규칙을 만들게 된 것은 모두 아드리안 빌라르트의 가사를 특별하게 여겼던 것으로부터 기인했다고 보고있습니다.


네덜란드 작곡가들 요약

 

요하네스 오케겜, 야콥 오브레흐트, 죠스켕 데 프레, 아드리안 빌라르트 등과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작곡가들은 자신들이 활동했던 시대부터 약 200여년 이상 계속되는 대위적 다성음악의 기틀을 마련하여 서양음악사에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1555년 경까지 중요하고 권위있는 궁정 또는 교회의 음악감독 자리는 대부분 네덜란드 출신의 작곡가들에게 임명되었으며, 이들의 음악양식이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악보 인쇄술의 발달 또한 이들의 미사와 모테트, 샹송 등을 전 유럽에 잘 퍼질 수 있도록 한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들은 중세시대와는 조금 다르게 음악을 종교적인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고 미적 만족의 수단으로 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미사 통상문을 미사의식과 상관없이 하나로 묶어서 음악적인 통일성을 가진 연작미사로 작곡했던 것에서 그러한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종교적인 상징이었던 그레고리오 성가를 작곡가의 예술적 환상이나 작품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변형하여 사용한 것도 그 흐름 중 하나입니다.

 

모테트는 미사와는 다르게 가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들이 즐겨 작곡하던 장르였습니다. 특히 여기에 쓰이던 기법 중에서, 요하네스 오케겜이 즐겨 사용하였던 카논기법보다는 그보다 덜 엄격했던 죠스켕 데 프레의 모방기법이 더욱 더 많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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