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후기르네상스 종교음악 4/4(2022.06.28)-팔레스트리나 동시대인들

작은대학교 2022. 6. 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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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던 팔레스트리나라는 대 작곡가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마지막 시간이오니 참고바랍니다.

 


4) 팔레스트리나와 동시대인들

 

①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Tomas Luis de Victoria, 1548년 ~ 1611년)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는 팔레스트리나와 동시대에 로마에서 함께 활동했던 작곡가로, 팔레스트리나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로마악파의 중요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교육을 스페인에서 배웠지만, 1565년에 로마에 간 후에 공부를 하면서 팔레스트리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1575년에 성직자다 된 그는, 1587년에 스페인으로 돌아가 필립 2세(Philip Ⅱ)의 수도원에서 합창 지휘자와 오르간 주자로 죽을 때까지 일하였습니다. 스페인에 있는 동안에도 그는 책을 출판하거나 작품 연주를 위해 로마에 종종 갈 수 있었으며, 1593년에는 팔레스트리나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는 평생 종교음악만을 작곡하였으며, 그 결과 20여 개의 미사와 50여 개의 모테트, 40여개 정도의 찬미가, 약간의 시편, 마그니피카트와 의전음악 등을 남겼습니다. 그의 미사 중 15개는 패러디 미사이고, 4개는 변용미사이며, 1개는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곡되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패러디 미사들은 자기 자신의 모테트와 마리아 안티폰(Marian antiphon), 시편, 그리고 때때로 팔레스트리나와 쟈느켕 등 다른 작곡가들의 곡을 빌려서 작곡한 것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모테트 중의 하나인 《오, 모든 이여》(O vos omens)는 예레미아 애가(Lamentation)에 부친 4성부곡입니다.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는 이 곡에서 모방대위적 기법에 반복음을 가미하여 극적인 효과를 냈으며, 쉼표와 단 2도를 자주 사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표현적 특징은 아래의 악보에 있는 "sicut dolor meus"(나의 슬픔과 같은)과 같은 부분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빅토리아 《오, 모든 이여》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이 차분하고 객관적인 음악이라면,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의 음악은 표현적인 음악입니다. 그의 많은 곡들이 그의 낙관적이면서 명랑한 성격을 반영해주는 듯, 기쁨과 안락한 느낌을 주는 반면, 그의 애가들을 위시한 몇몇 곡들은 슬프고 신비로우면서 강렬합니다.

 

② 오를란데 데 랏수스(Orlande de Lassus, 1530, 1532년 ~ 1594년)

오를란데 데 랏수스는 팔레스트리나와 더불어 16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종교음악 작곡가로 꼽힙니다. 팔레스트리나가 미사곡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면, 오를란데 데 랏수스는 모테트에서 재능을 발휘하였습니다. 또한 세속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팔레스트리나와는 다르게 오를란데 데 랏수스는 많은 세속곡들을 작곡하였으며, 그의 종교음악에서도 세속선율을 사용한 것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 2000여 곡이 넘는 그의 작품들은 미사와 모테트, 마그니피카트, 시편, 찬미가를 위시하여 샹송, 마드리갈, 리트 등 그 당시 사용되던 모든 장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출처 : 오를란도 디 랏수스(1532 - 1594)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오를란데 데 랏수스

 

오를란데 데 랏수스
1532년 몽스(Mons)에서 출생
1544년 페란테 곤자가(Gonzaga)에게 고용되어 그와 함께 만토바와 시실리 여행
1547년 ~ 1549년 밀라노에 거주
1551년 경 로마의 피렌체 대주교에게 고용
1553년 로마에 있는 성 라테란성당의 성가대장
1555년 안트베르펜에서 초기 마드리갈과 모테트 출판
1556년 뮌헨에서 바이에른의 알브레흐트 공작 교회의 독창자
1558년 박킹어(Regina Wackinger)와 결혼
1563년 바이에른 궁정의 교회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많은 세속곡을 작곡, 유럽 여행하며 명성을 굳힘
1574년 교황으로부터 기사작위 수여
1574년 ~ 1577년 비엔나와 이탈리아 여행, 5권의 종교음악책 『파트로치니움 무지체스』(Patrocinium musices) 출판
1594년 6월 14일 뮌헨에서 사망

오를란데 데 랏수스의 음악 양식들도 그의 작품 종류만큼 다양한데, 네덜란드 악파의 대위법적 양식부터 이탈리아의 화성적 양식, 그리고 베네치아 악파의 화려한 양식, 프랑스적인 생동감, 독일의 진지함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점은 가사를 음악보다 우선시하여 음악은 가사의 표현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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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윌리엄 버드(William Byrd, 1540년 ~ 1623년)

 

출처 : 윌리엄 버드 (1534 - 1623)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윌리엄 버드

 

윌리엄 버드는 영국의 다성노래와 신교의 음악 등 여러 장르의 곡을 작곡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버지날 음악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곡가로 유명하지만, 그보다는 역시 최고의 걸작은 그의 미사와 모테트들입니다.이러한 점에서 그는 16세기의 마지막 영국의 가톨릭 음악 작곡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헨리 8세 이후 영국의 종교적인 상황 때문에 3개의 미사만밖에 쓰지 못했는데, 이 곡들은 흔히 미사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가사의 반복이 거의 없고 모방적 다성음악의 기법을 많이 사용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작곡된 형태입니다. 또한 시작동기(head motive)에 의해 곡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등 비교적 보수적인 경향이 있지만, 이 곡들은 지금까지도 영국의 가장 훌륭한 미사곡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윌리엄 버드의 모테트들은 대체로 종교적인 용도로 작곡된 곡들로써 윌리엄 버드의 숙달된 대위적 기법과 가사그리기가 훌륭하게 녹아든 곡들입니다. 윌리엄 버드는 그 시대 작곡가들 중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모테트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후기 르네상스 종교음악 요약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여파로 개신교가 탄생하면서 자연스럽게 신교음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코랄은 17세기 서양음악의 중요한 원천이 되어 중세시대의 그레고리오 성가와 버금가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이외의 나라에서는 신교운동이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교의 재확산 움직임이 더 크게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영국 이외의 지방에서는 중요한 신교음악이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카톨릭 교회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 자체적으로 정화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음악적으로도 이 회의의 권고에 따라서 더욱 순수하고 종교적인 음악을 작곡하려는 움직임들이 생겼습니다. 특히 이 운동을 이끌어 나간 사람은 팔레스트리나로 그의 음악은 '종교음악의 표본'으로 인정되어 이후의 많은 종교음악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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