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후기르네상스 종교음악1/4(2022.06.24)-독일

작은대학교 2022. 6. 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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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이 어떻게 발달되어왔는지, 특히 세속음악이 어떻게 발달되어 왔는지, 그리고 국가별로는 어떤 흐름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세속음악이 두드러지게 발전했기 때문에 종교음악이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쇠퇴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 음악 속에 세속음악이 많이 차용되어 사용되어지다가 르네상스시대의 후기에 가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종교음악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독일에서 어떤 변화의 흐름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Ⅷ. 후기르네상스 종교음악

16세기에 들어서서 음악의 관심이 종교음악에서 세속음악으로 이동하지만, 종교음악이 쇠퇴한 것은 아닙니다. 이 때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새로이 생겨나게 된 개신교의 필요에 부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작곡될 필요가 있었고, 가톨릭에서는 전통적인 교회음악 형식인 모테트와 미사가 후기 르네상스시대의 작곡가들에 의해서 다시 화려하게 꽃피우게 됩니다. 

 

1. 개신교음악

 

과도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교황의 권위는 점점 떨어졌고, 성주들도 그에 대한 불만으로 유럽에는 국가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독일지역에는 아직 나라라는 개념이 없었고, 교권이 떨어진 교황청에서는 거대한 성당을 세워 권위를 다시 높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거대한 성당을 짓기에는 돈이 부족했던 교황청은 독일지역에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고, 이를 못마땅해 하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 1546년)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독일을 선두로 유럽에서 일어나게 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16세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히는데, 이 사건은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의 의전과 행적적인 개혁, 더 나아가 교회의 부패를 없애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동시에 교회를 통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신을 만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찾기 위한 움직임이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종교개혁가들은 예배의식에 라틴어만을 사용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겼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자연스럽게 예배의식에 자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틴 루터의 이 종교개혁은 독일에서부터 스칸디나비아까지 전파되었으며, 이후에는 장 칼뱅(Jean Calvin, 1509년 ~ 1564년)을 주축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까지 전파되어 북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이혼(당시에는 이혼이 불법)이라는 개인적인 문제로 교황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가톨릭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영국국교(성공회)를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1) 독일

 

① 마틴 루터

마틴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교회 대문에 카톨릭의 각종 비리가 적힌 95개의 반박문을 붙였을 때 그는 어떠한 종교개혁을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원했던 것은 면죄부를 포함해 그 당시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들을 논의하려고 했던 의도였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결국 가톨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면죄부는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줄이기 위해 다른 사람이 했던 선행들을 사들이는 제도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부패가 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교리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반박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틴 루터가 개혁을 하려고 했던 것들은 의전적인 부분이 아니라 교리에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구교와의 분리가 된 후에 신교(루터교회)에서는 라틴어를 포함한 기존의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했던 의전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음악에 있어서도 새로 작곡한 음악과 기존에 가톨릭에서 사용하던 교회음악이 그대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라틴어 가사를 그대로 부르거나, 라틴어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부르기도 했고, 아예 새로운 독일어 가사를 붙여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좋은 테너 음성의 소지자였으며, 플루트와 류트를 연주할 수 있었는가 하면 음악이론과 작곡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음악은 신이 주신 선물로 신학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은 16세기에 생겨난 루터교회의 음악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요한 발터(Johann Walter, 1496년 ~ 1570년)의 『작은 종교 노래책』(Geystliches Gesangk Buchleyn)의 서문에서 "나는 그리스도 교리 때문에 모든 예술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모든 예술, 특히 음악이 그것을 창조하신 신에 대한 예배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틴루터는 기악음악을 그가 출판한 『독일어 미사』(Deutsche Messe) 서문에서 "언제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될 때에는 모든 종과 오르간을 울릴 것이며 무엇이든지 소리나는 것은 사용할 것이다"라는 문구를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음악이 교육적으로 유익하고 윤리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합창학교를 권장하였고, 예배에서 회중도 함께 노래를 부를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루드비히 젠플(Ludwig Senfl, 1486년 경 ~ 1542, 1543년)과 요한 발터 등 당시 활동했던 작곡가들과 함께 교회에서 회중과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코랄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 가사를 가지고 있던 미사와 모테트도 개신교 예배에 꾸준히 사용되어 바흐 시대까지도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는 예배음악의 일부를 라틴어로 불렀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독일 교회에서는 부분적으로 라틴어 노래가 아직도 불려지고 있습니다.

 

② 코랄

루터교회에서 사용된 음악의 핵심은 코랄(Choral, 영어로는 Chorale)인데, 이것은 교회노래(Kirchenlied)라고도 부릅니다. 이를 현대 용어로 부르면 찬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찬송가는 주로 4성부로 구성된 곡이지만, 코랄은 원래 가사와 하나의 선율만으로 이루어진 독일어로 된 찬미가로 반주없이 불렀기 때문에 중세시대의 단성성가에 비견됩니다. 코랄은 회중이 모두 함께 부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실용적이면서도 기억하기 쉬워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랄의 가사는 규칙적이고 운문적이었으며 선율도 여러 번 반복되는 유절형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중세시대 이후에 사용되던 가톨릭교의 음악이 단성성가에서 발생된 것과 마찬가지로 17, 18세기의 루터교회음악 또한 이 단성 코랄에서부터 발전되었습니다.

 

③ 콘트라팍툼

코랄은 초기루터교회에서 회중들과 함께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대부분 유절형식이며, 새로운 선율이나 기존에 알려져 있는 선율에다가 종교적인 내용의 독일어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기존의 선율은 성가나 비의전적인 노래, 세속노래, 민속노래 등입니다. 이런 빌려온 선율에다가 가사만 바꾸어 부르는 것을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오소서, 우리의 구세주여》(Veni Redemptor gentium)의 선율에 가사만 바꾸어 《오소서, 나라의 구원자여》(Nun komm' der Heiden Heiland)라는 신교의 찬송가를 만든 것입니다. 즉 요즘에도 볼 수 있는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 당시 루터교회에서는 회중이 부를 수 있는 코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새로 작곡하기도 했지만, 많은 곡들을 대부분 콘트라팍툼으로 만들어서 사용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도 코랄 가사를 많이 작사한 후에 여기에 맞춰 작곡을 하거나, 다른 선율들을 편곡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인 《내 주는 강한 성》(Ein' feste Burg ist unser Gott)은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마틴 루터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 슬라이드 1 (kocw.net)/《내 주는 강한 성》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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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다성 코랄

루터교회의 작곡가들은 일찍부터 일반 회중이 아닌 전문적인 합창단을 위해 다성코랄들을 작곡하여 출판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곡들은 다양한 종류의 다성양식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이 양식들을 보면, 첫째, 독일 다성 리트와 같이 코랄 선율이 정선율로 취급되어 긴 음표로 테노르에 놓이고, 세 개 이상의 다른 성부들이 모방이 아닌 독립된 모티브로 테노르를 감싸고 있습니다. 둘째, 네덜란드 모테트처럼 코랄의 각 악구가 모든 성부에서 모방적으로 발전됩니다. 셋째, 코랄 선율이 테노르 선율에 놓이고, 다른 성부들은 수직화성적 짜임새에 가까운 대위선율로 구성됩니다. 넷째, 코랄 선율이 제일 윗성부에 놓이고 모든 성부가 수직화성적 짜임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6세기가 지나면서 점점 윗성부에 주선율이 놓이는 양식이 우세해졌고, 마침내 16세기 후반이 되면 코랄의 모든 성부가 수직화성적 짜임새이고 주선율이 윗성부에 놓이는 칸티오날(Kantionale) 양식이 성립되게 됩니다. 코랄은 찬미가풍으로 단순한 리듬이며 16세기에는 무반주로 불려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후 17세기에 들어서면 코랄을 오르간 반주에 맞춰 회중이 제일 윗성부를 부르는 것이 관례로 여겨지게 됩니다. 

 

⑤ 코랄 모테트

중세시대의 모테트가 단성성가로 부터 시작되었던 것과 같이 코랄선율은 코랄 모테트(chorale motet)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코랄선율이 코랄 모테트로 발전하는 과정은 중세시대 모테트의 발전과 유사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즉 2성이나 3성 코랄 모테트는 중세시대의 모테트처럼 코랄선율이 최저성부인 테노르에 놓이고 다른 대위선율들이 첨가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중세시대의 작곡가들이 성가를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나 해석을 첨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존하려 함이었는데, 이것과 같은 맥락으로 코랄의 가사와 선율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말이 되면 이런 형태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는 15세기에 활동했던 종교음악 작곡가들이 했던 것들처럼 코랄의 선율을 자유로운 예술창작의 재로로 사용하고, 여기에 예술가들의 해석들을 첨가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코랄선율이 모든 성부에서 모방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하고 이 선율을 한 성부에 놓고 다른 성부들이 모방대위적으로 진행하는 형태의 코랄 모테트가 작곡되어집니다. 코랄 모테트가 등장함에 따라 신교의 교회음악은 회중이 부르는 단순한 칸티오날 양식의  찬송가와 전문적인 합창단이 부르는 화려한 음악으로 확실하게 구분되게 됩니다. 한스 레오 하슬러(Hans Leo Hassler, 1564년 ~ 1612년)와 미하엘 프레토리우스(Michael Praetorius, 1571년 경 ~ 1621년) 등이 대표적인 코랄 모테트 작곡가들로, 이들에 의해 확립된 독일의 신교음악 양식은 바흐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게 되고, 향후 200년간 독일음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 코랄 : 교회노래, 찬송가, 원래 가사와 하나의 선율로만 이루어진 독일어 찬미가, 유절형식

▶ 콘트라팍툼 : 기존의 선율을 빌려와 가사만 바꾸어 부르는 것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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