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19세기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세기 배경을 알아본 뒤부터는 18세기~19세기의 주요 미학적 흐름을 분류해 서술해보도록하겠습니다.
2. 19세기
19세기에 등장한 낭만주의는 문학으로부터 출발한 운동이었고, 독일에서부터 강화된 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환상적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던 낭만적이라는 말은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낭만이라는 말은 17세기 중엽부터 등장했는데,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Novalis)가 낭만주의(Romatik)라는 개념을 고전주의(Klassik)와 대비시키기 위해 사용하면서 등장하였습니다. 낭만주의라는 말은 18세기 말, 독일 문학에서 판타지를 자극하기 아주 좋은 소재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 소재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그 시대의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내용인, 즉 신기한 이야기, 몽상적 이야기, 요술적 이야기, 모험적 이야기들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현실과의 밀착성보다는 예술가의 주관과 감정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이후에 음악적 소재에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독일의 대표적인 문학가들은 자신의 소설과 시에 음악적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해 부러워하고 칭송했으며, 더 나아가 당시의 음악가들보다 음악을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이런 면들은 음악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로도 확산되었습니다. 철학자로는 헤르더가 이런 생각을 가장 먼저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미 음악을 예술종교적인 차원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괴테가 확신이 있게 말하진 않았지만 표면적으로 여러 예술 중에 음악이 가진 독특함과 탁월성을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동력이었던 노발리스와 슐레겔 또한 비슷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는데, 그들은 한층 강화된 주관적 표현으로 음악을 칭송했습니다. 그 이후에 활동했던 문학가 박켄로더, 티크, 호프만, 장 폴 등은 문학을 통해 음악을 표현해보려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의 음악관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낭만주의는 꿈의 세계 혹은 동경의 세계를 갈망하며 허망한 현실적 삶을 한탄하는 정신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런 두 세계 사이의 갈등이 낭만적 이야기를 끌고 가는 동력이 되는데, 낭만주의의 오페라도 이런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나 줄거리가 없는(개념이 배제되어 있는) 기악에서는 그런 모델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동경의 세계가 더욱 잘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대두되었습니다. 실제의 음악과 낭만주의를 처음으로 접목시킨 사람은 E.T.A. 호프만인데, 그는 그 모델을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삼았고, 이들의 음악 중 기악음악을 낭만적인 예술로 보았습니다. 그가 사용한 낭만적이라는 개념은 예술의 질적 개념이었습니다. 즉 낭만적이라는 것은 예술이고, 그렇지 못하면 비예술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호프만은 모든 예술 중 음악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기악이 가장 낭만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생각이 계속 이어져 음악 자체를 절대화시키는 의미를 담은 '음악의 형이상학'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기악의 위치를 높이려는 생각은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언어를 통해 음악을 보려는 경향이 강했고, 기악의 역할이 미미했던 이탈리아 역시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영국과 문화적 호흡을 같이했던 스코틀랜드에서는 18세기(1770년)에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절대음악론에 대해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음악이 외적 자연을 모방한다는 당시의 모방이론에 대해 냉정하게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노래에서 가사를 없애면 그 음악은 외적 사실을 전혀 나타낼 수 없고, 어떤 기악곡에서 제목이나 설명이 붙어있지 않다면 그것을 언어적으로 해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언어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음악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는 언어와 관계없는 기악은 그 자체로 들어야 되지,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는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소나타협주곡을 그 음악에 맞게 들으려면 음악 자체의 리듬적 흐름과 형식을 파악, 기억, 종합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일종의 절대음악적인 사고로, 이후에 등장한 한슬릭의 주장과 매우 흡사합니다. 하지만 그의 사고에는 음악을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예술종교적으로 보는 성격은 없었습니다. 그는 음악에 관한 열광보다는 차분하게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독일에서는 기악의 절대화와 함께 그 반대적 경향, 즉 표제음악의 경향이 있었습니다. 표제음악론자들도 자신을 낭만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바그너, 리스트 등), 그들도 음악을 통해 동경의 세계를 끌어오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표제음악은 기악적 외면을 가지고는 있지만, 언어화할 수 있는 줄거리나 제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표제음악은 문학적, 혹은 음악외적인 소재로부터 지배당하기 때문에 덜 음악적이라는 비난이 이미 호프만에게서도 있었고, 이후에 한슬릭에게서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절대음악이냐 표제음악이냐하는 문제는 낭만주의적인가 아닌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제였습니다.
19세기에 등장한 음악우위론은 철학분야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쇼펜하우어, 쉘링 등은 철학의 중심에 음악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독일의 19세기는 철학보다는 예술과 더 잘 맞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분야로부터 독립되고자 했던 '예술을 위한 예술'의 탄생이 바로 이 시기에 있었고, 또한 가장 독립적일 수 있는 예술이 바로 음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슐라이어막허는 신학자의 입장에서 예술이 그 자체로 절대화되었다는 의미의 '예술종교'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제 그녀(예술)는 아무 것에도 봉사하지 않고 모든 것이 다르게 되었고 더 나쁘게 되었다"라고 말했는데, 이런 말을 통해 당시 예술의 위치를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시기의 많은 문헌을 통해 오페라도 18~19세기에 대단히 중요한 논쟁거리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페라와 관련된 테마들은 오히려 기악음악과 관계된 것들보다 더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부퐁논쟁에서 보여주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격론은 음악, 언어, 민족, 계급, 옛 음악/새 음악, 비극/희극과 같은 다양한 접촉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논쟁은 18세기의 새로운 사상과 옛 사상이 오페라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로시니, 마이어베어, 바그너의 오페라를 중심으로 논의되었던 19세기 또한 다양한 접촉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음악/극, 선율/화성, 개인/사회, 박절/비박절, 새 음악/옛 음악, 절대음악/표제음악과 같은 테마들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은 오페라에 관한 논의가 기악에 관한 논의보다 더 현실적이고 사회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출처 : 음악미학. 홍정수, 오희숙 지음. 음악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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