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19세기 오케스트라 음악 1/4(2022.12.12)

작은대학교 2022. 12. 12. 18:00
반응형

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12월에 글을 올린다고 해놓고 이제서야 올리게 되어 참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휴식도 휴식인데 중간에 아파가지고 스케줄 조정에 실패를 해버렸네요. 여튼.. 지난일은 어쩔 수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19세기의 오케스트라 음악입니다. 19세기의 오케스트라 음악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교향곡과 프로그램 음악, 협주곡입니다. 하여 교향곡 2챕터, 프로그램 음악 1.5챕터, 협주곡 0.5챕터로 총 4번에 걸쳐 다루어 볼 예정입니다.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ⅩⅩ. 19세기 오케스트라 음악

 

베토벤의 교향곡 작품들은 19세기 중반 오케스트라 음악에게 나아갈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그 두 방향은 먼저 그의 교향곡 4번, 7번, 8번의 전통을 잇는 고전주의 형식의 절대음악과, 3번, 5번, 6번, 9번 교향곡에서 출발한 프로그램음악입니다. 절대음악을 고수하는 교향곡은 프란츠 슈베르트, 펠릭스 멘델스존,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 안톤 브루크너로 이어지게 되었고, 프로그램음악은 헥터 베를리오즈의 프로그램 교향곡(program symphony)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교향시(symphonic poem),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극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의 작곡가들은 각각 이러한 보수적이며 혁신적인 두 가지의 방향으로 오케스트라 음악을 이끌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르게 발전되어 가는 두 방향의 음악 속에서도 음악언어의 확장이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시도되었으며, 이는 19세기 오케스트라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 음악언어에는 음량, 음색, 다이내믹의 확장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피콜로, 잉글리시 호른, 베이스 클라리넷, 콘트라바순, 튜바, 색소폰, 다양한 타악기 등 새로운 악기들의 개발과 여러 가지 주법을 통한 새로운 음색의 추구로 인해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악기와 주법의 개발을 통해 발전되는 음악언어의 확장은 20세기까지 지속되게 됩니다.

 

1. 19세기 교향곡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절대음악 작곡가들은 고전시기로부터 물려받은 형식구조, 주제, 화성, 관현악법의 틀 안에서 음악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비록 이들이 작품에 제목을 부여했다고 해도 이것은 그렇게 음악 자체에 큰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 프란츠 슈베르트

 

출처 : 죽음과 소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년 ~ 1828년)는 비엔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 음악적 재능이 발견되어 8세가 되자 궁정교회 소년합창단원이 되었고, 왕립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년 ~1825년)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일찍부터 그의 서정적인 감성을 발견하고 이를 성장시켜 주게 됩니다. 1812년에는 목에 문제가 생기면서 교회 합창단을 그만 두게 되었고, 1814년에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그는 1816년까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지도 하에서 작곡을 계속 해나갔습니다. 1818년에는 에스테르하치 궁정에서 요한 백작의 두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위해 헝가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지만, 곧 비엔나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개인레슨과 작품 수입, 기부금 등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는 늘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병세가 조금 나아질때마다 간간이 작곡을 하곤 했습니다. 31년이라는 짧은 생애 중 그는 1820년대 초디에 징슈필과 오페라 같은 극장음악을 작곡하긴 했지만 이 중 어떤 작품도 그가 생존했을 때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많은 리트를 작곡했고, 가사에서 독립된 절대음악 장르로서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향곡 중에 마지막 교향곡(D. 944)인 제 9번(The Great C Major Symphony, 1825년 ~ 1828년)이 그의 가장 탁월한 대작으로 꼽히지만, 가장 인기 있는 교향곡은 역시 《미완성 교향곡》(Unfinished)이라고 알려진 b단조 교향곡(D. 759)입니다. 이 교향곡의 첫 두 악장은 1822년에 작곡되었지만, 결국 그는 이 작품의 끝을 맺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 교향곡의 뿌리를 베토벤과 그의 교향곡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란츠 슈베르트
1797년 1월 31일 비엔나에서 출생
1808년 비엔나 궁정 소년합창단원
1810년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사사
1815년 학교 교사, 리트 작곡
1816년 교사직 사직, 〈슈베르티아덴〉 개최
1818년 에스테르하치 백작 자녀 피아노 교사, 첫 번째 공공연주회
1822년 피아노곡 《방랑자 판타지》〈Wanderesfantasie〉, 《미완성 교향곡》
1823년 병에 걸림,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Die Schone Mullerin)
1824년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8중주, a단조 현악 4중주
1825년 〈슈베르티아덴〉 다시 개최, 교향곡 9번 작곡 시작
1827년 연가곡 《겨울나그네》(Winterreise)
1828년 마지막 세 피아노 소나타, 현악 5중주, 11월 19일 비엔나에서 사망
반응형

 

2) 펠릭스 멘델스존

 

출처 : 펠릭스 멘델스존F.Mendelssohn - Seoul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simf.kr)/펠릭스 멘델스존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년 ~ 1847년)은 부유하고 교양 있는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나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월등히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누나(Fanny Mendelssohn)는 독일 문학과 전 유럽 여행을 통해, 그리고 괴테 등 당대 문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19세기 독일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문화적, 사회적 영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매력적인 외모와 사교술,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능 덕분에 인생에 큰 굴곡 없이 지휘자와 행정가로서의 사회적 명성을 쌓아나갔습니다. 또한 펠릭스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작품 초연 100주년을 기념해 1829년 라이프치히에서 연주를 한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독일의 옛 음악 운동에 공헌한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음악사에 자리매김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섯 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제 1번 교향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 《교향곡 제 2번》은 "찬미가"(Lobgesang, 1840년), 3번은 "스코틀랜드"(Schottisch, 1830년 ~ 1842년), 4번은 "이탈리아"(Italienisch, 1833년), 5번은 "종교개혁"(Reformation, 1829년 ~ 1830년)입니다. 2번 "찬미가"는 1840년 인쇄술 발명 400주년을 기념한 구텐베르크 축제를 위해 작곡된 것으로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거대한 칸타타입니다. 3번 "스코틀랜드"는 1829년 영국 방문 당시 스코틀랜드여왕 메리의 궁전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곡입니다. 마찬가지로 4번 "이탈리아"는 1830년 ~ 1831년 이탈리아여행에서 얻은 인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3번과 4번 교향곡은 여행에서 받았던 인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음악적 기행문으로 회화적인 묘사, 그 지역 고유의 춤 리듬, 낭만적인 감정의 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한편 5번 "종교개혁"은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30년 작곡된 것으로 서주에 〈드레스덴아멘〉, 피날레에 루터의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 사용되었습니다.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