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19세기 오케스트라 음악 2/4(2022.12.14)

작은대학교 2022. 12. 14. 18:00
반응형

안녕하세요. 작은대학교입니다.

 

오늘은 19세기 오케스트라의 두 번째 시간으로, 지난 시간에 이어 교향곡에 대해 이어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이번에 알아보는 것은 국가별로 구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교향곡과 프로그램음악으로 구분지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3) 로베르트 슈만

 

출처 : 로베르트 슈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로베르트 슈만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년 ~ 1856년)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아마추어 작가로도 활동했던 그의 아버지에게 영향을받아 문학적인 소양을 키우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곧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갔지만, 음악가로서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장래의 장인이 될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에게 피아노를 배워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했지만 손가락이 마비되면서 그 꿈을 포기하게 되었고, 대신 작곡가와 음악평론가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835년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를 창립하고 그 곳의 편집인이 되어 1844년까지 음악평론가로서 활동했습니다. 로베르트 슈만은 일생동안 일정한 시기에 한 장르를 집중적으로 작곡했는데, 1840년에는 리트, 1841년에는 교향곡, 1842년에는 실내악, 1843년에는 오라토리오 작곡에 전념하였습니다.

 

로베르트 슈만은 네 개의 교향곡을 완성했는데,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형식적으로 매우 다양한 시도들을 감행하였습니다. 1841년에 작곡한 《교향곡 제1번》은 일명 "봄"(Fruhlingssymphonie, 1841년)으로 네 악장에 각각 '봄의 시작-저녁-즐거운 놀이-봄의 만개'라는 부제가 붙어있었지만 출판시에 삭제되었습니다. 2번 교향곡은 베토벤의 교향곡과 많이 닮아 있고, 3번 교향곡은 라인강 주변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 "라인"(Rheinische, 1850년)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유일하게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향곡 제4번》(1841년 ~ 1851년)에서 그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각 악장이 쉼 없이 이어서 연주하도록 구상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형식 때문에 그는 이 작품을 "교향적 판타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악장의 구분 없이 연달아 연주를 하는 형식은 고전주의 형식의 명확한 악장 구분에 비해 낭만주의 작품의 특징인 흘러가는 음악의 연속성을 강조하거나, 또는 순환형식을 통한 악장 간의 연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습니다.

 

4) 요하네스 브람스

 

출처 : 요하네스 브람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요하네스 브람스

프란츠 리스트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교향시나 음악극과 같은 프로그램음악에 주력하는 동안 절대음악으로서의 교향곡은 한 동안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하여 고전주의 장르였던 교향곡과 현악사중주 등의 절대음악을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는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프로그램악파였던 신독일악파(Die Neudeutsche Schule)와 맞선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년 ~ 1897년)가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절대음악의 위상을 다시 끌어올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함부르크의 태생으로, 도시의 악사였던 아버지가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여 피아노를 배우게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주로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했던 그는 피아노 소나타와 가곡과 같은 소품들을 작곡했습니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주게 된 인물은 바이올리니스트 에드 레메니(Eduard Remenyi, 1828년 ~ 1898년)였습니다. 1853년, 20세의 나이로 에드 레메니와 함께 여행길에 오른 요하네스 브람스는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작곡가로 활동했던 요제프 요하임(Joseph Joachim, 1831년 ~ 1907년)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슈만 부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로베르트 슈만에게 자신의 첫 피아노소나타들을 보여준 것이 작곡가로서의 천재성을 인정받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여 이때 로베르트 슈만은  『음악신보』에 요하네스 브람스를 극찬하는 「새로운 길」이라는 기사를 실어 그를 널리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
1833년 5월 7일 함부르크에서 출생
1848년 첫 번째 피아노 연주회
1850년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와 함께 연주여행 중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과 친구가 됨. 리스트와 만남
1854년 본에서 클라라 슈만을 만난 이래 그녀에게 헌신하게 됨. 초기 피아노 작품
1857년 함부르크에서 피아노 교사, 데트몰트 궁정 오케스트라 지휘자
1858년 《피아노협주곡 제 1번》
1859년 함부르크 여성합창단창단 및 지휘
1860년 리스트의 '신음악'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
1863년 비엔나로 이주, 합창협회 지휘자
1864년 ~ 1871년 함부르에서 자유롭게 피아노 교사 활동, 피아노곡, 실내악곡, 《독일 레퀴엠》
1872년 ~ 1875년 비엔나 필하모니 지휘, 《성 안토니 변주곡》
1876년 《교향곡 제 1번》
1877년 ~ 1879년 《교향곡 제 2번》, 《바이올린협주곡》, 《대학축전 서곡》
1881년 《피아노협주곡 제 2번》
1883년 《교향곡 제 3번》
1885년 《교향곡 제 4번》
1891년 클라리넷 연주자 뮐펠트(Richard Mulfeld)를 만나 그를 위해 네 개의 작품 작곡
1897년 4월 3일 비엔나에서 사망
반응형

 

요하네스 브람스는 펠릭스 멘델스존과 로베르트 슈만을 잇는 북독일의 작곡 전통 기법을 익혔지만, 1860년대에 베토벤과 로베르트 슈만의 도시인 비엔나에 정착했습니다. 그의 네 개의 심포니, 협주곡, 실내악곡들은 대부분 베토벤의 전통을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작곡한 이 장르에 속했던 작품들은 네 악장 구성이나 소나타 형식과 같은 고전형식의 기본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비록 꽉 차고 풍부한 오케스트라 기법이 요하네스 브람스 음악의 큰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그는 당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전통적이지 않은 악기의 사용이나 새로운 주법의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화성적인 언어는 조성 음악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대위법과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에 대한 열렬한 탐구정신을 작품 속 안에 그대로 반영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일례로 《교향곡 제 4번》 마지막은 거대한 샤콘느입니다. 그는 리듬적인 면에도 특별한 관심을 두었는데, 헤미올라나 복합리듬이 자주 나타나는 것처럼, 작품의 구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도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이런 리듬에 중요한 기능을 부여하는 것은 중세 동형리듬기법 이래로 음악사에 처음 나타나는 시도였는데, 이런 이유로 요하네스 브람스는 후기 낭만주의에 속하면서도 고전적 틀을 고수하는 고전적 낭만주의자(Classic-Romantist)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네 개의 교향곡 중, 1876년에 작곡된 1번 교향곡은 신독일악파에 의해 "베토벤의 아류"라는 비난을 받은 반면, 그를 옹호했던 보수주의자들은 이 작품을 "베토벤 교향곡 10번"이라고 평가해 그가 베토벤의 후계자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교향곡 1번과 2번은 이와 같이 베토벤이나 로베르트 슈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1883년과 1885년에 각각 작곡되어진 교향곡 3번과 4번은 요하네스 브람스 특유의 음악언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보다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분위기로 작곡되었습니다.

 

5) 안톤 브루크너

 

출처 : 안톤 브루크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안톤 브루크너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년 ~ 1896년)는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교향곡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작곡가임과 동시에 성당의 오르간 주자이자 가톨릭 종교음악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0세부터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서 오르간을 연주했고, 린츠에서 음악교육을 받았습니다. 1845년 ~ 1855년,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 체류하는 동안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종교음악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이 시절에 그는 오르간 연주자와 합창단 지위자로서 큰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69년 비엔나로 이주해 그의 스승이었던 지몬 제히터(Simon Sechter, 1788년 ~ 1867년)의 후임으로 비엔나 음악원에서 계속저음 및 대위법, 오르간을 가르쳤습니다. 1875년 ~ 1876년에는 비엔나대학에서 화성법과 대위법을 가르쳤으며, 1877년에는 궁정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는 40세가 된 1864년이 되어서야 미사곡을 발표했고, 1866년부터 1886년까지 아홉 개의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마지막 교향곡 9번은 결국 완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교향곡은 베토벤이나 프란츠 슈베르트 교향곡의 뒤를 이은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바로 교향곡 4번입니다. 이 작품은 네 악장 구성의 전통적인 교향곡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주제는 동기적으로 고안되었다기보다는 서정적인 경향이 강해 요하네스 브람스의 음악보다 발전적인 진행이 다소 약하게 나타납니다. 1악장의 두 주제는 전통적인 소나타형식에 나오는 두 주제의 성격적 순서와 달리 제 1주제로 서정적인 주제, 제 2주제로 격정적인 주제가 나옵니다. 2악장의 주제는 프리지아 선법으로 되어있으며, 피날레에서는 주제와 31개의 변주로 이루어지는 파사칼리아를 사용해 옛 요소를 낭만주의적인 음악언어와 조화시켰습니다. 피날레 주제는 그가 평생 존경했던 바흐의 칸타타 150번 〈주여, 저는 우러러 봅니다〉(Nach Dir Herr, verlanget mich)의 마지막 합창 주제입니다.


▶ 출처 : 새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허영한 외 6명 공저. 심설당.

반응형